[이우근 칼럼] 엄정한 질서 속에서 자유롭게 하늘 높이 날으는 철새처럼
철새는 수백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날아 오르지만 충돌사고 한번 일으키는 적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몇십 명만 모여도 서로 먼저 가려고 밀고 당기다가 부딪치고 다치기 일쑤지만, 미물(微物)이라는 새들은 서로에게 아무 피해를 주지 않는 엄정한 질서 속에서 자유롭게 하늘 높이 날아다닌다.
대자연의 섭리가 엄숙하다. 서로의 관계성을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새들은 잘 알고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무질서를 자유로, 일탈(逸脫)을 멋으로 착각하는 소위 문명인들은 얼마나 미개하고 어리석은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각기 고립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적 존재’다.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람과 자연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적 관계성의 고리로 끈끈히 맺어져 있다.
신앙인도 예외가 아니다. “혼자서는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Solus Christianus, Nullus Christianus.) 삼위일체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한 교부(敎父) 터툴리안(Tertullian)의 가르침이다. ‘나 홀로 신앙’은 거짓이라는 뜻이다. 타인(他人) 없이 신(神) 앞에 바로 설 수 없다. 이웃과 더불어 있는 자리, 거기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요, 신앙인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부르실 때, 그 사람 하나만을 부르지 않는다. 그가 속한 공동체를 함께 부르신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으로 부름받았다. 아브라함은 ‘복의 바다’가 아니었다. ‘복의 근원’이었다(창세기 12:2).
물줄기가 시작되는 근원에는 물이 넘치지 않는다. 근원에서 솟아오른 물이 골짜기를 따라 흐르며 크고 작은 시내를 이루다가 마침내 강을 만나고 바다로 흘러들면서 비로소 크게 넘쳐난다. ‘시작은 보잘것 없지만 마지막은 크게 될’(욥기 8:7) 복의 근원,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리였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른 것은 모세 한 사람만을 부른 것이 아니다. 모세와 함께 온 이스라엘 백성을 부른 것이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홀로 양을 치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로 더이상 홀로 있는 개인이 아니었다.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떼처럼 돌보고 이끌었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부름받은 목자였다.
바울은 개개의 크리스천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전체를 위한 일꾼으로, 나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았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형제, 곧 혈육과 동족을 위하여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노라.”(로마서 9:3)
그 공동체 안에는 나와 다른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타인도 있기 마련이다. 나와 다른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예수의 제자인 열심당원 시몬은 가슴에 늘 칼을 품고 다니는 시카리오(sicario), 무장독립투사였다. 그 시카리오는 동족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세리(稅吏) 마태를 마치 우리가 친일파 대하듯 친(親)로마파 반민족주의자라고 증오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타자들이 함께 모여 동행한 것이 예수의 제자공동체, 최초의 신앙공동체였다.
키엘케고르는 ‘신 앞에 선 단독자’를 말했지만, 그것은 ‘나홀로 신앙’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객관적 규범과 집단의 윤리의식을 벗어나 ‘자유의지로 신 앞에 홀로 서는 주체적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그 주체적 실존은 ‘신 앞에 홀로 서는 자유의 존재’이자 또한 ‘세상 앞에 이웃과 함께 서는 사랑의 존재’다. 그 이웃은 나와 다른 사람, 타자들이다.
“이해하려면 서로 약간 닮아야 한다. 그러나 사랑하려면 서로가 조금은 달라야 한다.” 극작가 폴 제랄디(Paul Géraldy)의 깊은 깨달음이다. 올바른 관계성을 위해서는 상호이해가 필수적이지만, 이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직 사랑만이 관계성을 온전하게 이루어 간다.
사랑은 너와 나의 ‘다름’을 아끼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나와 다르기에 애타게 너를 그리워하고, 서로 차이가 있기에 더 깊이 배려해주고 싶은 것이 사랑의 관계다. 나와 다른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폐쇄적 정의나 신념은 ‘닫힌 도덕’이다.
”모든 다른 것은 같다. 모든 같은 것은 다르다.” 시인 폴 발레리는 알았다. 같은 것을 다르게 여기는 것은 자유의 정신이고, 다른 것을 같게 여기는 것은 사랑의 영혼임을… 태극(太極)은 음양(陰陽)의 서로 다른 두 극을 한 품에 껴안은 무극(無極)이다. 음양은 자유, 무극은 사랑 아닐까?
‘다름’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가치관에 집착하는 독선은 증오와 대결을 낳을 뿐, 자유와 사랑의 관계에는 이를 수 없다. 서로의 차이가 뚜렷해야 사랑의 활력이 넘치는 ‘열린 도덕’에로 나아간다. 상대적인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모든 차이를 동일성 안으로 환원시켜 보편성에 종속시키는 절대적 유일주의(唯一主義)는 폭력의 사유임에 틀림없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는가?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46) ‘다름’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천둥처럼 울려온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타인은 물론이고 나와 생각과 삶이 전혀 다른 원수까지도 용납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사랑하려면 달라야 하기에… 서로의 ‘다름’을 짓밟는 동일성의 확신은 폭력의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