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

어느 해인들 가을 하늘이 맑지 않으랴만, 이 가을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다. 공기가 맑아서가 아니다. 하늘 아래 이 땅의 현실이 어느 때보다 어둡고 혼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의 상념(想念)도 속절없이 깊어진다. 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가을을 사랑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다. 초가을의 산들바람에 넋을 잃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낙엽 쌓인 숲길을 거닐며 우수(憂愁)에 젖어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빛깔을 다 풀어놓은 듯 농익을 대로 익은 단풍철도 아직 가을의 절정은 아니다. 가을의 멋에 흠뻑 취하려면 아무래도 늦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찬란했던 단풍잎들이 볼품없이 퇴색되어갈 무렵, 벌써 겨울인가 싶어질 때, 그제야 비로소 가을의 맛이 그윽해지고 상념은 원숙해진다.

가을은 모순의 계절이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도 잠시, 가을걷이가 끝나 휑한 들녘엔 이삭 잘라낸 볏단 더미만 남아 성취의 덧없음을 우울하게 말해준다. 나무들은 무성했던 잎을 다 떨어뜨리고 여윈 가지 끝에 힘겨운 세월을 겨우 매달고 있지만, 시들어가는 줄기 속엔 생명의 물길을 오롯이 품고 있다. 가을은 지금 성취와 허탈, 쇠락과 부활의 갈등으로 신음하는 중이다. 가을은 온통 모순투성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신경림, 갈대)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에서 고요한 울음을, 살아있는 것들의 눈물을 낚아채는 시심(詩心)이 애처롭다. 산다는 것의 의미를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하는 시혼(詩魂)이 너무도 측은하여 야속하기까지 하다. 가을이 가을인 것은 서늘한 바람 때문이 아니다. 추석의 환한 달빛 때문도 아니다. 가을이 가을인 것은 오로지 갈대 때문이다. 가을이기에 갈대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갈대가 흔들리기에 가을이다. 가을은 모순이기에, 갈대는 우리의 삶이기에.

2010년 9월 지하 갱도에 갇혀 함께 사진 찍은 광부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칠레 산호세의 구리광산 지하 700m에 69일 동안 매몰되어 있던 광원(鑛員) 33명이 모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칠레 국민은 물론 온 세계인을 감동시킨 인간애의 승리였다. 애타게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던 광원들은 정작 구조의 시간이 다가오자 서로에게 먼저 나가라고 권하면서 ‘살아 나오는 순서’를 양보했다고 전해진다. 생사가 걸린 그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말이다. 아, 진정한 사랑은 그 낮은 곳, 저 깊고 어두운 곳, 700m 지하 막장에 있었다!

우리네의 사랑도 그처럼 소외된 자리, 가난하고 그늘진 삶의 자리에서 문득 나타나곤 하지 않았던가. 고액 기부자들의 약 70%가 예순이 넘은 할머니들이라고 한다. 공부 길이 막힌 청소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장애우, 오갈 데 없이 외로운 노인들을 위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삯바느질 할머니, 김밥장수 할머니, 구멍가게 할머니… 그 낮은 곳의 어르신들 말이다. 재산이든 권력이든, 무언가 좀 가졌다 하면 몽땅 제 자식한테 물려주기에 바쁜 탐욕의 시대, 이 각박한 경제 만능의 사회에서,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으며 어렵사리 모아온 전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뜻 건네주는 것처럼 비(非)경제적인 일도 없겠다.

그러나 사랑은 본디 비경제적인 것이 아니던가! 황홀하게 눈멀어 제 모든 것을 그 앞에 내던지는 사랑은.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 그대여 / 가을 저녁 한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안도현, 가을엽서)

무덤보다 깊은 지하 막장에서 여름 내내 갈대처럼 흔들렸던 칠레의 광원들은 가을이 되자 마침내 절망의 어둠을 뚫고 소망의 빛을 캐냈다. 제 것을 버림으로써 가장 귀한 것, 금보다 구리보다 더 소중한 것, 사랑을 채굴(採掘)해냈다. 이제야 알 듯하다. 갈대가 왜 흔들리는지를, 가을이 왜 모순의 계절인지를, 나뭇잎이 왜 떨어지는지를. 아니, 사랑은 왜 그처럼 낮은 곳에 있는지를.

*이 글은 ?2010년 10월 18일자 ‘중앙시평’ 칼럼으로, ?중학 국어 3-1(디딤돌출판사)에도 실렸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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