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하늘나라로 가는 여행비용

노년이 되니까 그동안 걸어온 길에 비해 이제 남은 길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가야 할 여로가 짧은데도 더욱 많은 여비를 구하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게 현명한 것일까. 실제로 굶어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 그런 경우가 있다면 죽음으로 향하는 ‘최후의 행진’은 어떨까. 늙고 병든 약한 몸이 비라도 맞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죽었다고 하고 싶다.(본문에서) 이미지 엄상익 변호사 제공

내가 40대쯤 한참 변호사 일에 정력을 쏟아붓고 있을 때였다. 이따금씩 법정에서 허리가 굽은 늙은 변호사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재판장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지 손나팔을 귀에 대고 계속 다시 묻고 있었다. 재판장의 표정이 ‘이제 그만 쉬시지 왜 나오시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내 또래의 한 변호사를 만났다. 머리가 하얗고 거북이 목에 어깨도 굽었다. 당뇨가 심한 그는 만나서 잠시 대화를 나눌 때도 꼬박꼬박 조는 모습이었다. 그는 아직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법정에 갔더니 법원 직원이 내게 조용히 다가와서 ‘제대로 들리기나 하세요?’라고 물으면서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더라구.”

법원 직원은 내가 예전에 늙은 변호사를 측은하게 보던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세월이 지나면 늙은이가 되는 사실을 몰랐다.

그 변호사가 덧붙였다. “젊은 날 민주화운동 한다고 관념을 따라다니다가 그냥 관념이 되어 버렸어. 늙어서도 저승 갈 여비가 필요한 건데 말이야. 내가 영리하지 못했던 거지.”

나는 그를 보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돈이 없다고 그가 불쌍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정직하고 순수하게 살아왔다. 과거의 투쟁경력을 팔아서 현재를 살지 않았다. 그게 더 훌륭한 게 아닐까.

내가 50대 무렵 도서관에 가서 조병화 시인의 시전집을 모두 다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말년에 지은 것 중에 하나님에게 따지는 투로 쓴 시가 있었다. 저승 가는 노자는 점점 떨어져 가는데 언제 데려가실 거냐며 걱정하고 있었다. 늙고 병들고 가난해지면 시인도 그런 걱정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관념이나 추상보다 밥이 필요한 것이다.

나도 가난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일찍부터 그런 고민을 했다. 할아버지가 칠십 고개를 넘기고는 병으로 몇년간 드러누웠다. 할아버지는 불안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얼마의 돈을 머리맡에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난은 상속됐다. 아버지도 말년에 중풍으로 몸을 쓰지 못하고 돈이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살기 힘들던 나도 아버지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죽기 전에 이미 빈손이 되어 버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나는 이런 기도문을 공책 첫머리에 적고 매일 빌었다. ‘하나님, 고독하게 굶어 죽을 각오를 가지게 해주십시오’

능력 없는 나는 외로움과 가난의 십자가를 향해 두 팔 벌리고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돈과는 인연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폐허가 된 6.25전쟁터에서 태어나 70년 넘게 나그네로 살아왔다. 소년 시절 밤이 되면 성북동에서 안암동으로 흐르는 더러운 개천물 옆을 산책했다. 검은 물 위에 내려앉은 아름다운 별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수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얼어붙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전파상에서 나오는 가수 조영남의 열정적인 ‘딜라 일라’를 들었다. 대학시절 불기 없는 겨울 다방에서 듣는 비틀즈는 내게 자유이고 그리움이고 해방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즐거움은 은혜가 되어 눈같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해 버리고 나는 눈썹이 하얀 노인이 됐다. 이제는 노인의 생각을 글로 쓴다. 노인의 철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노년이 되니까 그동안 걸어온 길에 비해 이제 남은 길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가야 할 여로가 짧은데도 더욱 많은 여비를 구하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게 현명한 것일까. 실제로 굶어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 그런 경우가 있다면 죽음으로 향하는 ‘최후의 행진’은 어떨까. 늙고 병든 약한 몸이 비라도 맞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죽었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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