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참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의 가벼움

코레지오(Correggio 1490~ 1534) ‘거룩한 밤’ (말구유의 아기 예수)

옛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던 자리에는 지금 이슬람의 모스크인 알아크사 사원(Al-Aqsa 寺院)이 서 있다. 지난 10월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수천 발의 미사일을 퍼부은 군사작전의 이름이 알아크사였다. ‘가장 높다’는 뜻이다.

솔로몬의 제1성전이 무너진 지 70년 만에 스룹바벨이 재건한 제2성전은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의 로마군에 의해 상당 부분 파손되었고, 이것을 헤롯왕이 46년에 걸쳐 화려하게 증·개축했다.

?헤롯성전은 유대교의 심장 같은 상징이었는데, 예수는 그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질책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된 장군 티투스(Titus)의 군대는 예수 사후(死後)인 서기 70년, 헤롯성전을 ‘통곡의 벽’ 일부만 남겨둔 채 깡그리 무너뜨렸다. 예수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 것인가?

예수 당시에 성전을 모독하는 발언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였다. 이 예언은 결국 예수의 사형판결에 죄목으로 포함된다. 시골여관 말구유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번듯한 자기 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예수에게는 나라(祖國)도 없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태어나 로마총독의 손에 죽은 예수는 그 자신의 말처럼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소외인이었다. 소외가 철저했던 만큼, 그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아웃사이더(outsider)였다.??

사제(司祭)나 랍비의 예복을 몸에 걸쳐본 적이 없는 예수는 유대의 지배계층이나 민중으로부터 잠시라도 메시아의 칭호를, 구세주의 칭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사랑과 용서를 가르친 그는 종교재판에 넘겨졌지만 종교의 차원을 초월해 있었고, 독립투쟁의 무기를 든 적이 없는 그는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지만 정치의 영역 너머에 있었다.

?침략국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말하는가 하면, 가난한 자의 복(福)이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친 예수는 유대인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던 민족 해방자도, 정치적 메시아도 아니었다.

예수는 기존 체제에 저항했지만, 정치혁명이나 민중해방의 깃발을 든 적이 없었다. 식민지를 약탈하는 로마의 제국주의, 정의와 도덕을 비웃는 위선의 종교권력, 약자를 짓밟는 불의한 경제체제… 그 짙은 어두움 속에서 예수는 오직 ‘충만한 사랑의 세계, 소망 가득한 영혼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것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두려워한 예수의 저항이었다.

예수는 세상의 찬미와 경배를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치 시대의 순교자 본 회퍼의 말처럼, 그는 ‘타인(他人)을 위한 존재’였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내 목숨을 희생제물로 내어주려 함이다.”(마가복음 10:45) 예수 스스로 밝힌 성탄의 의미다. 희생제물의 출생을 흥겹고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헌금을 바치고 신앙고백문을 암송하기만 하면 마냥 복을 베풀고 병도 낫게 해주며, 죽은 뒤에는 천국으로 이끌어주는 ‘이승과 저승의 신통한 보장책’인가, 혹은 ‘민중의 고통 속에 죽고 민중의 의식 속에 부활한 민중 그 자체’인가?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없었던 예수는 그러나 저 세상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 도래(到來)하고 있는 천국’을 가르쳤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다수의 민중’이 아니라, 우리 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했다.

?크리스마스는 신자들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다. 교회 밖의 세상에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성전종교(聖殿宗敎)를 꾸짖고 이웃사랑의 삶을 가르친 아웃사이더 예수의 탄생이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시작이었듯, 교회와 크리스천도 세상과 사회를 위한 고난의 짐을 짊어지고 성속(聖俗)의 바른 관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은 입술로 외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구호가 아니라 선(善)한 삶으로 세상과 교감(交感)하고, 교리나 종교의식이 아니라 인격적 감화(感化)와 영적 충격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데 있을 터이다.

더러운 범죄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부패 정치인들이 자신을 마치 정치권력에 희생된 십자가의 예수인 것처럼 꾸며대는 위선과 기만(欺瞞)의 시절… 악마도 ‘빛의 천사’처럼 가장(假裝)한다고 했던가?

어느 때보다도 진실과 평화의 메시지가, 그 겸허한 위로의 목소리가 그리운 이때, 제도종교권(制度宗敎圈)의 으리으리한 대형교회당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이벤트보다는 차라리 말구유처럼 초라한 시골 예배당의 소박한 자리에 성탄의 참뜻이 오롯이 담겨있지 않을까?

아웃사이더 예수는 왕실의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 희생제물은 시골여관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아웃사이더의 생일잔치라니, 울긋불긋한 네온사인으로 흥청거리는 희생제물의 생일축하라니… 참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의 가벼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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