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기복과 형통’ 대신 ‘회개와 고난’으로

“고백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회개는 뉘우칠 회(悔)와 고칠 개(改)가 합쳐진 말이다. 회개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 즉 잘못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뉘우칠 ‘회’만 있고 고칠 ‘개’가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본문 가운데) 사진은 1517년 가톨릭의 타락에 반박하는 95개조항을 발표한 마르틴 루터. <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체코의 순교자 얀 후스(Jan Hus)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얀 후스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이름은 모두 ‘요한’이다.

오직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다가 화형으로 죽임을 당한 얀 후스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처럼 종교개혁의 역사를 예비한 새로운 요한이었다.

순교자 얀 후스로부터 종교개혁의 불씨를 이어받은 루터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후스파(派)다.”(Ich bin Ein Hussite) 개혁신앙을 따르는 우리 또한 후스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루터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서의 가르침(하박국 2:4, 로마서 1:17)을 평생토록 붙들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보서 2:26)이라고 단언한 야고보서를 루터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낮게 보았다.

그렇지만 루터가 행함을 업신여기고 오직 믿음만 소중하다고 강변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가르침(누가복음 6:43)을 인용하면서 “올바른 믿음에는 응당 그에 걸맞은 믿음의 행위가 따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믿음이 고백만으로 족한 것이라면, 루터가 굳이 목숨 걸고 종교개혁의 험난한 길을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행함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고백과 하나 되지 못한 행함, 그 영혼 없는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불신자들 중에도 남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도덕적 인격자가 적지 않지만,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다. 신앙의 고백이 없기 때문이다.

고백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회개는 뉘우칠 회(悔)와 고칠 개(改)가 합쳐진 말이다. 회개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 즉 잘못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뉘우칠 ‘회’만 있고 고칠 ‘개’가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써 붙인 95개조의 항의문은 그 제1조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회개의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인 제95조가 ‘평안에 대한 그릇된 확신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처음이 회개, 마지막이 고난이다.

루터는 가톨릭 교황이나 사제들에게만 회개와 고난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우선 루터 자신이 투철한 회개의 사람이었고, 험난한 종교개혁의 길을 모진 핍박 속에서 달려간 고난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단순한 방법’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크나큰 죄를 지었고, 또 감사할 줄 몰랐던 것을 자복합니다. 나는 매우 게으르고 편안한 휴식을 좋아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음을 회개합니다.”

우리도 루터를 따라 회개의 자리에, 그 돌이킴의 삶에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기복(祈福)과 형통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회개와 고난, 그 십자가의 신앙으로 참 종교개혁, 진정한 개혁신앙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후스파다”라고 외친 루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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