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차마고도와 한반도 DMZ의 ‘오래된 미래’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산허리는 아득히 먼 옛적 지각 변동으로 생겼을 것이 틀림없는 바위 틈 사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멀리 희미한 녹색으로 뒤덮인 계곡의 밑바닥은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만약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곳은 평화로운 은총으로 가득 찬 땅이리라.”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샹그릴라(Shangri-La)를 묘사한 대목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이성과 과학의 성취에 회의를 품게 된 인류는 다시금 신과 자연의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난개발과 환경 파괴, 무절제한 산업화와 인간관계의 단절에 절망한 세계인들은 앞다퉈 유토피아를 찾아 나섰다. 티베트인들이 ‘마음속의 해와 달’로 여겼다는 샹그릴라를.
이상향의 대명사로 떠오른 샹그릴라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티베트·네팔·부탄·파키스탄의 산록 마을들이 저마다 샹그릴라를 자칭했다.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소수민족의 삶터를 강점하고 있는 중국은 2001년 윈난(雲南)성에 있는 티베트족 자치주 더칭(迪慶)의 중뎬(中甸)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개명했다. 중뎬이 소설 속 샹그릴라의 풍광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2003년 유네스코는 중국의 샹그릴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다른 나라의 샹그릴라들은 헛물을 켠 셈이다.
샹그릴라는 수천 년 동안 티베트의 말과 윈난의 보이차가 오고 간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주요 경유지다. 평균 4000여m의 해발고도로 장장 5000여㎞를 내달리는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200년이나 앞서 열린 인류 최고(最古)의 육상 교역로다.
아득히 치솟은 만년설의 산봉우리들, 시리도록 투명한 강과 호수, 수정 구슬을 뿌린 듯 찬란한 밤하늘의 별빛, 사계절을 두루 품은 숲과 들판이 끝없이 이어진다.
차마고도의 길목에 라다크라는 고원지대가 있다. 19세기까지 독립 왕국이었던 히말라야의 ‘작은 티베트’다. 그곳에서 16년 동안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생태환경의 바이블로 불리는 <오래된 미래>를 펴냈다.
외래 문명이 아닌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으로 소박하게 이어져온 라다크의 자연친화적인 삶에서 호지는 인류가 나아갈 방향, 그 오래된(Ancient) 미래(Future)의 역설을 계시처럼 깨달았다. ‘옛것의 창조적 회복’에 담긴 희망을··· 풍광의 샹그릴라가 아니라 정신의 샹그릴라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기술문명과 개발 풍조로 인해 고유한 전통문화를 잃어가는 차마고도의 또 다른 모습은 크나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샹그릴라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천년 고성(古城)의 문화재급 목조건물들이 불길에 사라졌다. 샹그릴라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부터 예고됐던 비극이다. 돈벌이의 장삿속은 유토피아를 단숨에 디스토피아로 바꿔버렸다.
차마고도는 단순히 말과 차만 오고 간 교역로가 아니다. 역사가 만나고 문화가 교류되는 소통의 길, 화합의 길이었다. 차마고도를 따라 형성된 마을들 한복판에는 어김없이 사방가(四方街)라는 아담한 광장이 열려 있다. 다른 언어, 낯선 관습의 종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서로 얽히고 융합하는 상생의 마당이다.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七縱七擒)했다는 웨이산(巍山)에는 후이족(回族)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중앙의 이슬람 사원에서는 오늘도 코란의 독경(讀經)이 이어진다. 차마고도, 그 오래된 미래의 옛길은 민족과 종교의 차이까지도 넉넉히 품어 안았다.
웅장한 옥룡설산(玉龍雪山)을 따라 길게 내뻗은 리장(麗江)의 차마고도를 느릿느릿 걷는 동안 우리의 비무장지대(DMZ)가 머리에 떠올랐다. 숱한 쌀과 비료, 필수 의약품과 시멘트 더미가 그 분단의 길목을 거쳐 북으로 올라갔건만, 북에서 날아온 것은 포탄과 어뢰뿐이었다. 차마고도는 혈통과 신앙의 차이마저도 녹아내렸는데, 어찌 독재의 우상이나 허튼 이념 따위가 우리의 산하(山河)를 가로막는단 말인가.
70년 긴 세월은 뼈아픈 분단의 현장을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탈바꿈시켰지만, 997㎢에 이르는 우리나라 비무장지대는 무슨 관광명소나 생태공원쯤으로 남겨질 땅이 아니다. 옛 어른들의 숨결과 자라나는 새싹들의 꿈이 한데 어우러지는 오래된 미래의 길목, 우리 마음속의 해와 달이 뜨는 한반도의 샹그릴라, 민족공동체의 정체성을 창조적으로 회복하는 통일시대의 관문이다. 그 시푸른 땅에 소통과 화합의 사방가 마당이 펼쳐지는 날을 더없이 소망한다. 남과 북을 이어주는 숲길에서 문득 저 오래된 미래와 만나는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