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고난, 그 소망의 날개

구약시대의 선지자들

무릇 예언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을 찾아 날개를 펴는 소망의 몸짓이다. 그 소망은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과 절망스러운 현실의 인식 곧 뚜렷한 역사의식에서 솟아난다.

역대기하에는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왕들의 행적에 대하여 여러 권의 책을 썼다고 기록돼 있다(역대기 하 26:22, 32:1~23). 이사야가 예언자인 동시에 역사가였다는 뜻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종교적 환상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뚜렷한 역사의식에서 솟아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언자는 죄악과 불의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사람이다. 죄악의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만이 그 불의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웃시야 왕 시대는 남유다 왕국의 전성기였다.

웃시야 왕은 초강대국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국력을 크게 키웠다. 안보에 힘을 쏟아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했고, 에돔인들에게서 항구도시 엘롯을 되찾아 국제무역의 요충지를 확보했으며, 목축업과 농업을 장려해 국가경제의 기초를 든든히 다졌다.

​이러한 번영기에 위기가 찾아드는 법이다. 국력을 바탕으로 한껏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스스로 제사장의 직분까지 거머쥐려다가 문둥병으로 죽었다. 게다가 유대교 사제들은 형식적 종교의식에 젖어 올바른 삶의 자리를 떠나버렸고, 백성들도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적.신앙적으로 나태해졌다. 이때 초강대국 앗수르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왔다.

온 백성이 구원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위기상황에서 이사야는 그 메시아를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정치, 외교, 군사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수난의 종을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로 보는 견해도 있고,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포로들을 고향에 돌려보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한 페르시아왕 고레스(키루스)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신약성서는 이 고난받는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사도 빌립은 이사야서를 읽고 있던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그 고난받는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준다(사도행전 8:26~36).

어둠 속에 빛이 비치듯, 시련 속에 소망이 움트고 고난 속에 희망이 솟아난다. 우리는 지금 북한의 핵위협과 내전(內戰) 같은 내부갈등 속에서 안팎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정치, 외교, 군사의 힘이 필요한 시련의 때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소망을 깊이 품어야 할 때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그 고난의 종을 따라 소망의 날개를 활짝 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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