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믿음은 예배나 신앙고백 속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몸의 철학자’로 불리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인간의 몸이 모든 지식의 토대”라고 했다. 지식은 머릿속의 의식이나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 감각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언제나 몸이라는 한계 속에서 얻게 된다는 ‘의식의 신체화’를 주장했다.
이것은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대륙관념론과 로크, 버클리, 흄으로 계승되어온 영국경험론을 모두 부정하면서, 정신과 의식의 세계까지도 신체라는 바탕 위에서 이해하려는 현대 실존주의의 한 흐름이다.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잠언 9:10)에도 어긋나는 무신론 철학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퐁티의 주장에서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의식이 신체화되지 않으면, 즉 머릿속의 의식이나 생각이 몸의 체험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살아있는 지식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식의 신체화는 ‘진리의 성육신(成肉身)’ 구조와 매우 닮아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진리 그 자체로 머물러있지 않고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성육신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 요한의 증언이다(요한1서 11). 진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니, 어느 철학자도 알지 못했던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로 유명한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라고 해석했다. 관념적 존재론이나 추상적 학문체계 속의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 시간과 공간의 생활세계 안에서 염려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존재가 바로 인간의 현존재(Dasein)라는 뜻이다.
일상의 삶이 없는 존재는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생명의 진리가 인간의 일상적 생활세계 속에 육신을 입고 현존재로 나타났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이다. 그 진리의 언어(로고스) 곧 생명의 말씀은 우리들 현존재의 집이 되었다. 삶과 일상과 육신이 없는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다.
?믿음은 예배나 신앙고백 속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일상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고백의 육화'(肉化) 즉 ‘믿음의 성육신’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다”라고 권면했다(로마서 12:1). 동물의 시체로 드리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 그것이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가르침이다.
몸과 영이 하나로 만나는 신비로운 자리가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다. 몸의 현상학, 의식의 신체화를 주장한 무신론 실존철학의 메를로 퐁티도, 세계 내 존재를 강조한 생활세계 철학의 하이데거도 모두 알지 못했던 성육신의 또 다른 비밀이 아닐 수 없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을 지닌 예수는 말씀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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