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보수와 진보, 젊음과 늙음

할아버지와 소녀 (Louis Auguste Mathieu Legrand)[

“남은 수명에 비례해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더욱 뜨겁게 달군 폭탄선언이었다. 이 말을 한 제1야당 혁신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청년들의 정치참여를 호소하는 발언의 진의(眞意)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변명했지만, “미래가 짧은 사람들…” 운운한 막말을 ‘노인 폄훼’ 말고 달리 어떻게 새길 수 있을까?

언필칭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의 노인 비하(卑下)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인분들은 (투표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 “60, 70대에는 뇌세포가 변해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된다.” “(노친네들 투표 못하게 온천여행 보내드리는 당신이) 진짜 효자!” “노인네들 시청역 못 오게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를 모두 없애버리자.”

​노년 세대의 보수적 투표성향을 마뜩잖게 여기는 저들의 머릿속에는 ‘노인은 보수, 청년은 진보’라는 고정관념이 깊게 박혀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보수와 진보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 의식의 문제다.

늙음과 낡음은 다르다.

몸은 늙어도 정신은 낡지 않고 오히려 늘 새로워지는 원숙한 인격, 옛것과 새것을 한 품에 아우르는 백발의 지혜가 드물지 않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사도바울의 말이다(고린도후서 4:16).

낡음과 새로움은 겉모습에 있지 않고 속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젊다’는 형용사, ‘늙다’는 동사다. 젊음은 특정한 시기의 어떤 모습을 가리키고, 늙음은 오랜 세월과 함께 진행되는 생명의 운동성을 나타낸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발효와 숙성이 이뤄진다. 인격도, 품성도 그럴 것이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유별나다. 그 보수가 참 보수인지, 그 진보가 진정한 진보인지 아리송하기 때문이다. 보수정권이라는 현 정부는 미래세대를 위한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추진 중인데, 진보정당이라는 야당은 국제관계의 미래를 외면한 채 오로지 한-일관계의 과거사에만 매달려있다.

민족은 보수우파의, 세계화는 진보좌파의 가치이지만, 우리 정치권의 진보는 민족을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고 보수는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려 한다. 핵무기를 거머쥔 북한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보수-진보의 성격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이다.

​존재론‧인식론이라는 관념적 형이상학에 생생한 삶의 숨결을 불어넣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인간을 ‘세계 내 존재'(In- der-Welt -Sein)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구체적 시간과 공간의 생활세계 속에서 온갖 염려(Sorge)를 안고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이며, 일상적 인간의 현존재(Dasein)는 역사성과 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을 겪어오며 삶의 체험이 커질수록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보수로 쇠락하고, 오늘의 보수가 내일에 새로운 개혁의 날개를 펴는 것이 인류역사의 큰 흐름이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싸우는 적군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악기들처럼 서로의 다름 속에서 일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여야 한다.

​겉모습은 낡아가도 속마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름다운 늙음이요, 그 늙음 속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름다운 젊음일 터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세대 간의 갈등은 늘 있었고, 그것이 역사발전의 한 축이 되어온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신세대가 구세대의 가치관을 답습하거나 혹은 멸시하는 사회라면, 희망은 없다. 아울러 젊은이의 꿈을 불온한 반항쯤으로 여기는 기성세대도 아집(我執)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젊음의 아득한 꿈길을 막아서는 어른 세대나, 늙음의 경험과 희생을 외면하는 젊은 세대나, 인생의 오묘한 기미(幾微)를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투표는 미래를 위한 선택만이 아니다.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을 살아내려는 주권자의 통시적(通時的) 결단이다. ‘미래에 살아있지도 않을’ 늙은 세대에게만 맡길 수 없고 ‘과거를 살아보지도 못한’ 젊은 세대에게만 내맡길 일도 아니다.

밝은 사회는 찬란한 꿈과 함께 풍성한 경험을 요구한다. 미래를 품은 젊음, 역사를 품은 늙음… 그 꿈과 경험의 만남이, 보혁(保革)의 화합이 필요한 것이다. 변화의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보수’는 경이롭고, 역사와 전통 앞에 머리를 숙일 줄 아는 ‘겸손한 진보’는 감동적이다.

젊은이의 꿈을 단지 철부지의 수상쩍은 모반(謨反)으로만 몰아붙이지 않는 너그러운 노년, 생명의 불꽃이 나날이 사위어가는 은빛 머리의 나이테에서 ‘위로받아야 할 고독한 영혼’을 발견할 줄 아는 따뜻한 젊음, 그 동행이 아쉽다. 철없는 정치꾼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그 아름다운 동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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