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오늘 중복, 개에 대한 예의
“개들은 먹을거리가 생기면 배가 터지도록 먹어댄다. 개들이 제가 토해낸 것도 꺼리지 않고 먹어치운다는 사실은 굳이 성서(잠언 26:11)를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 개들은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개들은 우리와 똑같다.” 알베르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가 <어느 개의 죽음>에 쓴 글이다. 개와 인간을 탐욕의 동류(同類)로 본 것이다.
그르니에는 애완견 타이오가 늙고 병들어 고통스러워하자 안락사를 선택한다. <어느 개의 죽음>은 타이오가 남긴 허전한 자리를 그 죽음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사유들로 채워간 글이다. 그 사유는 인간이 타인과, 세상과, 자연과 맺는 관계의 성찰에까지 이른다. 인간은 자연을 잃어버렸지만, 개들은 우리가 다시금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개는 기다릴 줄 안다. 제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자연의 섭리에 운명을 맡긴 채 속절없이 기다린다. 사람들처럼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자연을 신뢰하는 성품에 관한 한, 인간이 개만 못한 것 아닌가.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배신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무작정 기다리고 앉아있는 유기견의 모습은 기나긴 가뭄을 고통스럽게 견뎌내며 끈질기게 빗방울을 기다리는 대지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이 양수기를 돌리고 기우제를 지내고 인공강우를 실험하며 온갖 법석을 떠는 동안 대지는 묵묵히 기다릴 따름이다.
야속한 하늘이 노기(怒氣)를 풀고 목숨 같은 단비를 내려줄 때까지, 마르고 터지고 갈라진 대지는 쇠잔해가는 숲과 짐승들을 품어 안은 채 자연의 조화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다. 주인이 사라진 부둣가를 하염없이 서성이는 상처투성이의 작은 개처럼.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고 썼다. 그르니에가 개를 자연과 교감하는 통로로 여겼다면, 쿤데라는 개를 낙원과 교감하는 통로로 승격시킨 셈이다. 개가 낙원을 떠났다면, 아마도 추방된 인간을 따라나선 탓일 게다. 소설 속의 애완견도 늙고 병들어 안락사로 숨을 거둔다. 추방된 인간의 손길을 벗어나 다시 낙원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충성스런 개에 관한 일화는 숱하게 많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도 의견비(義犬碑)가 하나 서있다. 술에 만취해 풀밭에 쓰러져 잠을 자던 주인이 번져오는 들불에 타죽게 되자, 냇물로 제 몸을 적셔 풀밭에 뒹굴며 불길이 번지지 않게 해 주인을 살려내고 자신은 지쳐서 죽은 개의 비석이다. 갸륵하기 이를 데 없는 의리(義理)의 미담이지만, 술주정꾼 주인이 그토록 충성을 받을 만한 존재였을까.
개는 제 동족인 개보다 주인을 더 좋아한다. 자유로운 야생의 늑대가 사람의 손에 길들여져 개로 변신한 이후, 본성적으로 사람에게 의존하는 유전자가 심겨진 것 아닐까.
작가 카를 크라우스는 노예 같은 개의 충성심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개는 충직하다. 그렇지만 개의 충성을 모범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개는 사람들에게 충직할 뿐 다른 개들에게는 충직하지 않다.”
제 동류보다 주인을 더 좋아하는 개의 모습에서 이웃보다 신을 더 사랑하는 종교인, 국민보다 이념에 더 충실한 정치인을 연상하는 것은 개에 대한 모욕이다. 개에게는 우직스런 의리와 신의라도 있지 않은가.
개의 의리는 일상을 함께 하는 인간을 향한 것이다. 일상 속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거짓이고, 일상 속의 민생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면서 추상적 이념의 구현에 몰두하는 정치는 독선에 불과하다.
개들은 자연과 인간과 일상에 눈물겹도록 충직하다. “개들은 우리와 똑같다”는 그르니에의 독설이 언짢다면, 개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볼 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개만큼이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신의 율법을 핑계로 이웃을 미워하는 종교인, 이념을 앞세워 주권자인 국민을 제 뜻대로 끌고 가려는 정치인은 개의 신의라도 배우기 바란다. 그것이 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