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우월감과 열등감 그리고 ‘비교의식’

“자존심은 아침에는 풍성하게 먹고, 저녁에는 가난하게 먹고, (밤에는) 악명(惡名)으로 배불리 먹는다”(Pride breakfasted with plenty, dined with poverty, and supped with infamy.) 벤자민 프랭클린의 탄식이다.

자존심은 때때로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자존심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주 비인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천박하고 비열한 자존심이다. 사실은 그 밑바닥에 열등감이 깊숙이 웅크리고 있다.

남보다 못하다는 잠재의식이 그 열등감을 보상할 방법을 찾게 되고, 그 보상의 방법은 대부분 가학(自虐)이나 질시(嫉視)가 아니면, 턱없는 자존심으로 나타나기 일쑤다.

​남의 우월감 때문에 내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의 상처는 남의 우월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은 나 자신의 열등감 때문일 것이다.

자학과 질시라는 열등감이 그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자질이나 능력을 과장하는 자존심으로 나타난다. 결국 자존심은 ‘상처 입은 열등감의 그림자’ 곧 시기와 질투의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열등감은 자신의 절망적 상황은 참아낼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의 희망적 상황은 도무지 견뎌내지 못한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는 속설처럼, 자신이 잘못되는 것은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지만 남이 잘되는 것은 도저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일그러진 심성, 시기와 질투의 열등감이다.

“자존심은 아침에는 풍성하게 먹고, 저녁에는 가난하게 먹고, (밤에는) 악명(惡名)으로 배불리 먹는다”(Pride breakfasted with plenty, dined with poverty, and supped with infamy.) 벤자민 프랭클린의 탄식이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모두 ‘비교의식’에서 나온 노예근성에 불과하다. 우월감은 상대방에 대한 비교우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는, 주체적이지 못한 종속적 인격성일 따름이다.

탁월한 인격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우위를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주체적인 가치를 추구해 나갈 뿐이다. 열등감이 지닌 인격적 종속성은 그보다 더 옹색하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에 스스로를 학대하고 남을 물어뜯는, 주체성 없는 정신적 노예나 다름없다.

​일이나 물건은 비교할 수 있지만, 인격과 삶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 가장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은 자신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꾸중하는 일이다.

그래서 가출을 하고, 마약을 삼키고, 심지어 자살에까지 이른다. 인격적 관계에서 비교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최후의 금기(禁忌)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비유를 말씀한 적이 있다. (누가복음 18장).

교만한 바리새인은 세리에 대한 비교우위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찾았고, 세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신의 죄성(罪性)을 직시했다. 세리는 바리새인을 향해 교만하다는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남을 교만하다고 꾸짖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겸손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가 없으면 자존심도 열등감도 있을 턱이 없다.

자존심은 상처 입은 열등감의 그림자일 따름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이렇게 권면했다. “허영에 들떠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질투하지 말라.”(갈라디아서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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