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욥’…의인의 고통, 선한 사람의 불행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구나.”(욥기 12:6) 뜻밖의 재난으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몸에 병까지 얻은 욥의 탄식이다. 욥기의 주제는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라는 이른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다.

괴테의 <파우스트>(Faust)도 욥기처럼 하나님과 사탄의 천상에서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선한 사람의 현세적 운명을 사탄의 손에 맡기자 사탄은 파우스트에게 쾌락과 성공을, 욥에게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쾌락과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꿈을 좇다가 눈이 멀어 죽어가는 자리에서 비로소 신의 구원을 만난다.

욥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욥기와 파우스트의 구체적 줄거리는 많이 다르지만 큰 틀은 매우 흡사하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았다고 단정한다. 이에 대해 욥은 악한 자들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고 의인이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획일적인 잣대로 세상만사를 판단하려는 도그마(dogma)는 옳지 않다고 항의한다.

즉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피상적인 번영신학(繁榮神學)을 거부하고 ‘의인의 고통, 선한 사람의 불행’이라는 심오한 신앙적 과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뇌성마비 장애를 안고 태어난 송명희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없는 것 나 갖게 하셨네.”

송 시인은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할 많은 이유를 가진 사람이지만, 그는 도리어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찬양한다. 그 찬양은 오직 깨우친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영혼의 평안, 재물과 권력으로 마음이 부요해진 사람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하늘의 복이다.

그 은총을 깨달을 때까지 송명희 시인은 분명히 처절한 좌절과 방황의 긴 터널을 눈물로 통과해오면서 남다른 분투와 노력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신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 그 방황과 노력 끝에 구원의 은총을 만난다.

고통 속에서 좌절하던 욥은 마침내 이런 확신에 이른다. “주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방황과 고통 끝에 얻게 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순금 같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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