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렌즈 판소리] ‘독공獨功’과 ‘득음得音’

선암사 수양벚꽃 <사진 배일동>

득음 경지에 오르려 소리를 갈고닦다

이동백 명창의 공부담에서 본 것처럼, 예전 명창들은 매우 이른 나이에 독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지금 나이 열아홉, 스무 살이면 고3이나 대학 초년생쯤 된다. 그 나이에 요즘 소리꾼들은 고등학교나 대학으로 소리 공부를 가지만, 예전 명창들은 이동백 명창처럼 폭포나 산중으로 소리 공부를 갔다.

이러한 점만 봐도 예술의 공력이나 철학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도를 깨치는 일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지 않던가. 훌륭한 예술은 다변(多辯)이 필요 없다.

막자치기(창법에서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우기는 소리를 말한다) 공부로 견성성음(見聲成音)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이미 서른이 된다. 그때는 독공이 굉장히 어려운 여건이 된다. 직장도 얻어야 하고, 결혼도 해야 되고, 이런저런 세상일로 독공은 꿈도 꾸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득음은 머리나 학벌에서 오지 않고 절차탁마의 갖은 노력에서 온다.

고통을 처절히 겪어야만 득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요즘 소리꾼들은 이 점을 깊이 고심해야 한다. 이러한 여건을 감안하여 대학에서도 교육의 핵심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허망하게 허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학 교육은 예술 철학과 정신을 가다듬게 하고 쓸모 있는 학문을 하게 만들어 예술적 안목을 고양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라도 스스로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는 데 정신적 발판이 되는 실제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

대학에서 단순히 소리 몇 대목 배워 나오고,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서 허송세월을 보내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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