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말레이 ‘버나마통신’ 나시르의 부드러운 ‘기자혼’을 기리며

나시르 유소프(왼쪽 네번째) 기자가 숨지기 몇달전 친지들과 자택에서.

말레이시아 <버나마통신> 기자로 37년간 저널리즘에 청춘을 받친 아시아기자협회 회원이자 <아시아엔> 필진으로 활동해온 모하메드 나시르 유소프 기자가 지난 2022년 5월 61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이에 그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고 교류해온 하비브 토우미 <바레인통신> 기자가 <아시아엔>에 추모글을 기고했습니다. <편집자>

[아시아엔=하비브 토우미 <아시아엔> 영문판 편집장, <바레인통신> 선임기자] 모하메드 나시르 유소프는 37년간의 말레이시아 <버나마통신사> 기자로서 일하는 동안 결코 자기 안주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인품’의 언론인이었다. 그는 1983년 10월 1일 버나마통신사에 입사했다.

그는 기자 초년 시절부터 기자로서의 기본적인 팩트의 취재에 충실하면서 교육 및 문화 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은 관용과 평화에 대한 강한 신념과 소명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다.

2019년 9월 아시아엔 주최 ’21세기 3번째 10년 아시아의 미래 포럼’에 참석한 나시르 유소프 기자, 여주 신륵사에서. 

그는 “기자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교육기회를 부여하고 그들과 정보공유를 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한 사회와 다른 사회, 나아가 국가 사이의 교량역할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말하곤 했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나시르 유소프는 2004~2009년 이 나라 최고 매체의 하나로 알려진 <버나마통신>의 자카르타 특파원 시절 말레이시아 언론과 인도네시아 언론의 유대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Ikatan Setiakawan Wartawan Malaysia-Indonesia’(ISWAMI) 창립에 앞장선 것도 바로 그의 강한 신념에 바탕한 것이었다.

2019년 4월 한국기자협회 주최 세계기자대회에 참석한 나시르 유소프(앞줄 왼쪽 세번째) 기자가 수원 삼성전자를 견학하면서. 그의 오른쪽 두번째에 이 글을 쓴 하비브 토우미 기자가 서 있다. 뒷줄 왼쪽 세번째가 아시라프 달리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나시르의 죽음에 대해 다투크 모크타르 후세인 ISWAMI 회장은 <버나마통신>에 기고한 추모글을 통해 “나시르는 인도네시아의 여러 언론인 단체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말레이시아 기자들이 인도네시아 기자들과 쉽사리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ISWAMI 인도네시아측 아스로 카말 로칸 회장 역시 “나시르 기자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양국의 저널리즘 교류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된다”고 추모했다. 나시르 유소프 기자는 2010년 이후 2020년 코로나팬데믹으로 해외방문이 어려워지기까지 말레이시아 동료 기자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기자의 날’ 등 언론 관련 행사에 자주 참석하면서 유대관계를 깊게 했다.

2020년 여름 나시르 유소프 말레이시아 국영통신 ‘버나마통신’ 선임기자(둘째줄 오른쪽)가 아시아엔 줌 미팅에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엔은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 봄부터 3-4주에 한번씩 줌 미팅을 통해 각국의 현안을 토론하고 있다. 강석재 아시아기자협회 부회장, 이상기 창립회장, 하비브 토우미 아시아엔 영문판 편집장, 아시라프 달리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아이반 림 아자 2대 회장, 에디 수프랍토 아자 수석부회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나시르 기자는 심오하고 서정적인 인간미와 저널리즘적 동지애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 그의 고국 말레이시아나 이웃 인도네시아 혹은 그 넘어 아시아 국가 어디든 그의 향기가 전해졌다.

그와 가까이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나 친구들은 나시르의 품성과 일과 사물에 대한 접근방식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해 솔직하고도 인간적인 헌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뇨와 심장질환 그리고 시력에 심각한 문제를 앓고 있으면서도 나시르 기자는 왓츠앱을 통해 동료들에게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고 아름다운 인용구와 인생의 지침일 될만한 메시지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사진 등을 공유했다.

나시르 기자가 40년 가까이 청춘을 바친 <버나마통신>에서 편집장을 지낸 자카리아 압둘 와합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나시르 선배는 왓츠앱이나 전화를 걸어 후배들 안부를 묻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상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든다.”

말레이시아 <버나마통신> 나시르 유소프, 이란의 푸네 네다이 <쇼크란> 편집장, 하비브 토우미 필자(왼쪽부터) 등이 2019년 9월 서울 명륜동 아시아기자협회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뒤에 이병철 삼성 창업자 흉상이 보인다

나시르 유소프 기자의 유명한 왓츠앱 메시지들은 그가 생전 만들어 놓은 방대한 네트워크를 타고 아시아와 그 너머로 전해지며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다. 아시아기자협회장 2대 회장인 아이반 림 싱가포르 기자는 나시르 기자의 신념과 탁월한 아이디어를 우리가 이어받자고 제안했다.

기자로서 나시르의 꼼꼼한 성격은 버나마통신사가 신뢰할 수 있는 언론사로 자리매김하도록 많은 영감을 던져주었다. 그의 버나마통신사 동료들은 “나시르의 기자로서의 태도와 성실함과 근면성은 그의 완성도 높은 기사들의 원동력이 됐다”며 “나시르 덕분에 버나마통신사가 말레이언론연구소 등이 주관하는 권위있는 상을 포함해 수많은 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적인 태도로 동료들을 대하면서 공감과 연대의 가치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한발 더 전진하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인생관으로 주변 사람들의 아낌없는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나는 지난 5월 4일 그와 마지막 통화를 하였다. 당시 나는 키르키스스탄 수도 비슈케크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버나마통신사를 퇴직한 후 쿠알라룸푸르를 떠나 사라왁주의 미리란 곳에서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나시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1400km 떨어진 고향마을에서 대가족과 다시 만나 살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나와 채팅을 하는 사이 자신의 대가족 사진과 사연들을 업로드하며 소개해줬다.

2019년 9월 여주 신륵사 앞에서. 오른쪽부터 춘룬바타르(몽골), 나시르 유소프(말레이), 하비브 토우미(바레인), 란퐁(베트남), 강석재(한국), 차재준(한국), 이상기(한국), 황규학(한국), 푸네 네다이(이란) 기자 등이 함께.

2020년 3월 7일 나시르가 버나마사에서 편집장 직책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면서 그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보낼 더 많은 시간들이 무척 기대된다”고 내게 자랑했었다. 그리고 2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난 5월 하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오던 중 당뇨와 심장질환 등에 시달리던 그는 피로감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고 말았다.

큰아들 누르 나즈미 나시르는 “아버지는 비행기에서 내린 후 호흡곤란을 호소했고, 눕고 싶다고 말씀하신 후 숨을 거두셨다”며 “고향 미리의 라야축제를 마치고 돌아온 뒤였다”고 했다. 나시르 기자는 이튿날 풍습대로 가족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가이 칸탄 무슬림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는 2014년 6월 바레인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 버나마사를 대표해 바레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통신사기구(The Organization of Asia-Pacific News Agencies, OANA) 회의에 참석하러 왔던 터였다. 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버나마통신사와 내가 근무하던 바레인통신사의 업무제휴 의사를 타진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내가 당시까지 접한 것 중 가장 빠른 동의의 표시였다. 그것은 나시르가 말이 앞서기보다 ‘행동파’였기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48시간 만에 버나마통신과 바레인통신 간에 MOU가 체결되었다. 당시 바레인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가 축하사절로 참석했다.

이후 나시르와 나는 연락을 계속했고, 2015년 6월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는 라마단 기간이었는데, 일몰 직후 함께 ‘이프타르’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나시르와 나는 그후 또다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디어포럼에 재회했다.

당시 나시르가 단맛이 진한 과자와 대추야자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로 사갔던 기억이 새롭다.그와 나는 2019년 3월 한국기자협회 주최 세계기자대회에 함께 참석하면서 이번엔 서울에서 만났다. 우리의 대화는 개인적인 것에서 당시 위기에 처한 마하티르 수상과 말레이시아 정치상황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계속됐다.

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후 6개월 지난 2019년 9월 다시 한국에서였다. 아시아기자협회 주최 ‘21세기 3번째 10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포럼에 함께 초대받아서였다. 당시 우리는 민간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여주 소망교도소를 방문하고 신륵사와 서울 청계천 관광 등을 하며 친구로서, 기자 동료로서 툭 터놓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함께 참석했던 그와 나뿐 아니라 몽골의 춘룬바타르 기자와 인도네시아 에디 스푸랍토 모두 1960년생 동갑나기란 걸 확인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시르는 무엇보다 누구와도 대화하길 좋아했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쉬운 문장으로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기자였다.

2019년 9월 여주 신륵사에서 나시르 유소프 기자

1983년 버나마통신사에 입사해 그곳에서 2020년 정년을 마친 나시르는 직업 이상의 소명으로서의 저널리즘 추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아시아기자협회가 ‘세계를 향한 아시아의 창’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그는 또 기자들이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비전을 늘 간직하려 했다.

그는 아시아기자협회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통해 미래 전망을 낙관했다. 그는 이상기 아시아기자협회 창립회장의 헌신과 기여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며 회원으로서 그와 동행하는 것이 매우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시르는 또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는 시니어 기자와 패기있는 야망과 도전의식으로 무장한 주니어 기자들의 균형 있는 조화로 시너지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오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행가능한 아이디어를 아자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안정한 건강상태와 시력의 악화로 아시아기자협회의 줌 회의에 여러 차례 빠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의 안과 주치의는 그에게 컴퓨터 모니터를 멀리하고 스마트폰에서 문자 보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나시르는 이런 일들을 딸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는 아시아기자협회과 당파성과 배타적 민족주의를 벗고,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해줄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설파했다. 그는 실제 아시아기자협회가 각국 회원들 사이에 협력과 조율을 통해 이 같은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이상기 아자 창립회장 겸 아시아엔 발행인의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렇게 왓츠앱에 썼다. “우리는 나시르 기자가 생전에 쓴 많은 감동적인 기사들과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가족을 향한 사랑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시르 기자는 아내 할리마 피이와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번역 김상윤 아시아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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