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⑦] 5살 운룡의 웅장하고 강렬한 글씨는 훗날…

인산 김일훈 선생이 쓴 글씨들. 화목 희망 인덕 용기 성실 신념 등…


인산 죽염으로 잘 알려진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은 각종 암치료 신약을 발명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독창적인 한방 암치료를 설파하며 난치병 환자를 평생 치료했다. 선생은 만성 질환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없는 세상, 육신이 파괴되는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는 세상, 암 환자 발생이 1%대로 낮춰지는 세상, 80대 노인들이 2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하며 낙원을 만드는 꿈. 이는 선생과 셋째 며느리로 인산 김일훈 문하에서 선생의 묘수, 비법을 전수받은 최은아 한의학박사의 바램이다. <아시아엔>은 최은아 박사가 쓴 <인산 김일훈 선생 전기 의황(醫皇)을 연재한다. 독자들의 애독과 건강 증진에 보탬 되길 바란다. <편집자>

운룡의 형제들은 모두 남다르게 총명하여 서당에서도 천재 집안으로 소문났지만 운룡은 그 중 유달리 눈에 띄었다. 이마는 훤하게 넓고 안광이 서기 어린 듯 빛났고 귀볼은 길게 늘어져 아무리 둔한 보통 사람들이라도 한눈에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운룡은 네 살 때에 서당에 다니던 여덟 살 누나가 할아버지로부터 한글을 배우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이틀 만에 한글의 원리를 깨쳤다. 말소리를 문자로써 표현하는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이틀간 깊은 숙고 끝에 간파하여 따로 연습할 필요없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이었다. 한글을 알게 된 운룡은 곧바로 한자 옥편을 통째로 암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놀라운 총기와 신비스러울 정도의 이해력을 발휘하였다. 마치 오래전에 이미 터득하고 있던 내용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한문본 <명사십리>와 <능라도>, <조운전>, <충렬전>, <삼국지>, <계명편>, <당시>, <두시>, <강희자전> 등을 닥치는 대로 독파해 나갔다. 할아버지 김면섭의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은 운룡의 거침없는 독서량 앞에 금세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다.

운룡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듣곤 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이나 공자 외의 모든 것은 사문난적으로 여겨 오히려 민가 여인네들을 통해 고대 한국사가 구전되고 있었다. 운룡의 할머니는 여인네 치고는 머리가 총명하여 구전되어 오던 한국의 역사를 모두 외워 그대로 운룡에게 전해 주었다. 고조선의 발원지였던 북방에서는 여인네들을 통해 오천년 동안 단군사가 멸실되지 않고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룡은 지필묵을 챙긴 후 방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 서예를 익히고자 했다. “어머니, 제가 얼마간 글씨 연습을 해야 하니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세요. 부르지도 말고 방문도 열 생각 마세오. 끼니때가 되면 밥이나 넣어주시면 됩니다.”

도무지 다섯살 난 어린아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한창 개구쟁이 노릇을 하며 뛰어놀 어린아이가 스스로 글씨 공부를 한다고 두문불출하기를 선언하니, 기특하다는 생각에 앞서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남다르게 보이긴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한 어린 자식일 뿐으로 그저 유달리 총명한가 보다 하는 정도지 자기 자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운룡이 무한히 넓은 우주 속의 수많은 별의 운행을 읽어내고 깊고 깊은 땅속의 세밀한 성분까지 감지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머릿속에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인 어머니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이었다.

“에미야, 운룡이 일로 마음에 근심을 두지 말거라. 필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아이이니 가끔 방 안의 기척이나 살피는 것으로 족해야 할 듯싶구나. 앞으로도 저 아이에 대해서는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운룡의 어머니는 시아버지 김면섭의 권유에 따라 글씨 연마에 집중하는 어린 아들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운룡은 하루종일 먹을 갈아 붓을 손에 쥐고 글쓰기 수련을 시작했다. 밤이 오면 불을 켜고 낮이 되면 불을 끄고 자는지 마는지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방문틈으로 디밀어 넣어준 밥을 먹고 빈그릇은 방문밖에 내어 놓고 이렇게 한달이 지나갔다. 어느 듯 운룡은 붓을 쥔 손에 기가 모아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면에 깃들어있던 에너지가 한달 간의 단련으로 질서를 얻어 글쓰기의 달인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운룡은 한달의 수련을 마치고 마음에 흡족함을 느끼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이 후 운룡은 붓을 들면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대로 일필휘지가 될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작고 많음의 차이가 있지만 잠재력이 내재해 있다. 예술적, 학문적, 도덕적 에너지 원석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지만 자신 속에 묻혀져 있는 원석을 발굴해내고 활성화시켜 그 에너지를 무한증폭시켜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그대로 평범하게 일생을 마쳐 에너지 원석은 그대로 흙으로 돌아가 또다시 누군가에게 깃들어 자유를 얻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원석을 가지고 있어도 활성화시키지 못하면 무가치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천재로 태어난다고 다 천재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둔재로 태어난다고 둔재로 일생을 마치라는 법은 없으리라.

운룡은 핵폭탄보다 더 광대한 에너지 원석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또한 스스로 활성화시켜 무한히 증폭시킬줄 아는 실천가요 노력가였고 자신의 숨겨진 내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지혜로운 아이였다.

김면섭은 운룡이 써놓은 습자(習字)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해서(楷書)와 행서(行書), 초서(草書)를 망라하여 써놓은 운룡의 글씨들은 평생 글씨를 쓰며 살아온 김면섭 자신의 필치(筆致)를 이미 능가하고 있었다. 글씨 속에 쓴 이의 에너지가 그대로 뿜어져 나오는 듯 용이 꿈틀거리는 듯 웅장하고 강렬한 기운이 힘차게 넘쳐 흐르고 있었다.

‘대체 이 아이는 누구일까? 장차 어디까지 나아가 무슨 일을 하게 될꼬?’

김면섭으로서는 손자 운룡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재능에 새삼 경외(敬畏)스러운 마음을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때는 한일합병 이후의 일제 강점기였다. 운룡의 범상치 않은 면모(面貌)가 세상에 알려지면 한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는 일제의 마수가 운룡에게도 뻗쳐올지 모른다는 우려를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김면섭은 집안 내에 운룡과 관련된 얘기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 엄중 단속을 하는 한편, 운룡에 대해 더욱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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