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동순의 민족서사시 ‘홍범도’ 10권 이렇게 태어났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2001년 미국에서 돌아와 줄곧 서사시 ‘홍범도’ 작품을 다듬고 또 다듬는 일에 오래 몰두하였다. 그 방대한 작품 전체를 날마다 읽고 또 읽는 작업을 되풀이하였다.
표현이 잘못 된 곳, 역사적 사실의 부정확한 부분, 실감이나 현장감을 강화시킬 곳, 전체 리듬에서 현저히 약하게 느껴지는 부분, 혹은 너무 액센트가 지나치게 들어간 곳, 읽으면 읽을수록 허술한 부분이 자꾸 드러났다.
그래서 쓰는 일보다 고치고 다듬는 과정이 더 어렵다. 미국 다녀온 그 이듬해 겨울, 시카고대학 현대문학연구회에서 초청이 왔다. 백석 시에 대한 특강 요청이다.
반갑고 흐뭇한 마음으로 수락을 하고 ‘홍범도’ 작품 다듬기를 노트북에 담은 채 다시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백석의 시는 낯설고 생경하고 이채로웠으리라.
1년 만에 다시 와보는 시카고는 새삼 정겨웠다. ‘홍범도’ 시를 쓰느라 날과 밤을 새우던 곳, 늘 내다보던 미시간 호숫가를 거닐었다. 시카고대학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또 서사시를 꺼내어 계속 다듬었다. 거의 완성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그것을 오감으로 느낀다.
하지만 아직도 더 읽고 끝까지 다듬어야 한다. 시간이 여전히 더 필요하다. 2002년 여름, 영남대 해외봉사단이 꾸려지고 나는 베트남팀 단장으로 학생들과 호치민 외곽 투득지구 직업기술학교에 갔다. 그곳 낡은 학교 건물을 새로 도색하고 실습장비를 교체해주고 베트남 학생들과 함께 오락, 스포츠, 함께 우정쌓기 등으로 1개월을 그곳 기숙사에 머물렀다.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마음을 열고 만나니 흠뻑 정이 들어 작별의 시간은 눈물바다였다. 나는 호치민에서도 거의 매일 같이 ‘홍범도’ 작품 다듬기에 깊이 골몰했다.
남국의 여름밤, 1인용 모기장 속에서 노트북을 켜고 밤 깊도록 작품읽기에 온힘을 쏟았다. 온 생애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호치민의 삶과 홍범도 장군의 삶은 닮았다.
홍 장군은 아내를 일본군의 악질적 고문으로 잃었고 큰 아들 양순은 아버지 부대의 의병대원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 정평 바배기전투에서 전사했다. 결핵을 앓던 막내아들은 혼자 남의 집에서 병사했다.
장군은 전가족을 나라에 바쳤다. 그런 생각을 하니 숨이 더욱 가빠오고 작품 완성에 대한 사명감이 활활 불타올랐다. 실질적 완성은 아마도 베트남 호치민에서 마무리되었으리라.
한국과 미국, 베트남을 돌면서 드디어 완성이라는 단계에 도달한 과정은 홍범도 장군이 함경도를 거쳐 만주 봉오동, 청산리, 러시아의 스보보드니, 이르쿠츠크, 마침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어 알마티, 크질오르다 등지로 떠밀려다닌 그 고단한 유랑의 세월과도 닮아있다.
2002년 가을, 나는 탈고한 ‘홍범도’ 서사시를 가제본해서 들고다니며 여러 출판사와 접촉했다. 하지만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서사시의 시대가 아니다.” “10권 짜리 전집을 발간해도 상업성이 전혀 없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등등 이런 이유로 모두 퇴짜를 맞았다.
실망과 무기력에 넋을 놓고 있던 어느 날, 대학에 자주 오던 국학자료원 정찬용 대표를 만나 그간의 정황을 무심코 털어놓으니 뜻밖에도 자기가 흔쾌히 출판을 맡겠다고 했다.
이렇게 반갑고 흐뭇한 일이 있는가. 민족서사시 <홍범도>는 이런 곡절 속에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