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손편지] 민영 “李형같은 젊은분께서 힘 실어주었으면”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어떤 경우든 글을 읽어보면 그분의 성품과 기질, 습성까지 느낄 수 있다. 민영 시인이야말로 자상하고 따스하며 정겨움이 뚝뚝 느껴지는 기품이라는 것을 느낀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더욱 그러한 기질과 분위기를 실감한다.
1934년생이시니 어언 아흔 고개에 이르셨다. 늘 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나지막한 키에 가느다란 몸매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시는데 웃으실 땐 실눈이 아주 감겨 보이질 않는다.
말소리도 나직나직 도란도란, 따뜻하고 친절함이 듬뿍 전해져오는 그런 화법으로 상대를 먼저 감복시키신다.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시어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그곳 화룡현에서 명신학교를 다니다 그만두셨다. 그게 민영 시인 학력의 전부이다.
힘들고 어려운 성장기를 겪으셨고 주로 인쇄 출판 쪽에서 일을 해오셨다.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 <엉겅퀴꽃> <유사를 바라보며> <해지기 전의 사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 등이 있는데 민영 시인의 작품 스타일은 우선 당신의 외모처럼 짧고 단아하다.
간결하고 응축된 형태의 시작품은 대개 10행 안팎의 형식으로도 큰 울림을 머금고 있다. 전통적 서정과 역사성의 함축이 담겨있다. 삶과 시가 분리되지 않고 완전한 배합을 이룬다.
2003년 내가 민족서사시 <홍범도>를 완간해서 댁으로 한 질 보내드렸을 때 그걸 받으시고 이처럼 따뜻한 편지를 보내주셨다. 시는 짧은데 편지는 장강대하(長江大河)다.
세월은 덧없이 자꾸 흘러만 가고 나는 옛 편지를 꺼내 읽으며 그 시절을 추억한다. 민영 시인께서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다음에 편지의 전문을 소개한다.
李東洵 형 보세요.
이 해도 벌써 다 가고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려서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李형이 여러 날 전에 박승희씨와 공들여 편찬하신 이찬(李燦) 선생의 詩全集 잘 받았고 수삼 일 전에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써오신 <홍범도> 전10권의 大作도 택배로 잘 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실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을 소재로 한 서사시는 나도 마음 먹은 적이 있었는데, 워낙 재지 못한 성품이라, 또 기회도 없어서 손대지 못했습니다. 李형께서 그런 나의 몫까지 대신해 주셨으니 더욱 기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大敍事詩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요즈음 근 30년 동안 살아온 옛집이 소위 재건축에 걸리는 바람에 최근에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그날이 지난 10월 5일이니 얼마동안은 이삿짐을 부리고 정리하느라 북새를 떨었지요. 그런 와중에 책을 받았기에 이제야 고맙다는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홍범도 출판기념회를 그곳에서 연다는 기별을 받고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여러가지로 李형께 빚이 많아졌군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시도 예전처럼 씌어지지 않으니 걱정입니다. 아무쪼록 굼뜬 선배에게 李형같은 젊은 분께서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마가편(駑馬加鞭)이라고나 할런지요.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열심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또 즐겁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2003. 10. 21
민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