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경찰과 러시아 경찰···’인터폴’ 태동 낳다
영국; 혁명이 김빠지게 만들었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18세기에서 19세기로 바뀌면서 많은 요구가 터져 나왔다. 두 가지로 요약된다. (1)귀족의 특권 축소 (2)노동자의 권익 신장이다.
권력을 확보한 의회는 하나씩 고쳐나갔다. 산업화로 농촌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갔다. 지주 일가만 살고 농민은 거의 없는 곳이 속출했다.
이런 선거구에서도 여전히 한 명의 하원의원을 뽑았다. 지주가 당선됐다. 썩은 선거구(rotten borough)다. 1832년 이를 없앴다.
1842년, 광산에서 어린이와 여성에게 휴일도 없이 하루 14~15시간 일 시키지 못하게 했다. 광산법(Mine Act)이다.
1846년, 값 싼 외국산 곡물에 관세 매겨 비싸게 만든 곡물법(Corn Law) 폐지했다. 그 동안 서민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지주의 비싼 밀 사먹어야 했다.
1847년, 10시간 노동법(Ten Hour Act) 제정했다. 어린이와 여성을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시키지 못하게 했다.
물론 노동자는 선거권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에 피비린내 나는 “혁명보다는 개혁”이라는 암묵의 양해가 존재했었다.
런던경찰청 창설
이 시기에 경찰제도도 혁신이 이루어졌다. 무급無給 야경체제에서 24시간 근무하는 유급有給 경찰관 도입했다.
1829년 메트로폴리탄 경찰법(the Metropolitan Police Act)이 의회를 통과했다. 스코틀랜드 야드에 경찰청사 마련했다. 이로써 런던경찰 별칭은 ‘Scotland Yard’가 됐다. 이사 가면 앞에 ‘New’가 붙는다.
그해 9월 16일 임용식이 열렸다. 청장(Commissioner) 2명, 총경(Superintendent) 8명, 경감(Inspector) 20명, 경사(Sergeant) 88명, 순경(Constable) 895명 등 모두 925명이었다. 이들은 ‘peelers’ 또는 ‘bobby’로 불렸다.
9월 29일, 월요일 오후 6시. 순찰구역(beat)마다 순경(Constable) 배치했다. 조장=감독자 경사(Sergeant)도 나갔다. 첫 정식근무다. 1년 후 3천명으로 늘렸다. 이어 전국에 새 경찰(New Police) 설치해 나갔다.
1830년 확대 발전하는 철도에도 경찰이 도입됐다. 그해 11월 역을 비롯해 일정구간마다 역전경찰서(station police) 만들었다. 이들도 bobby라 불렸다.
bobby? peeler? 런던경찰 창설을 주도한 로버트 필(Robert Peel) 내무장관 훗날 총리의 애칭을 딴 별명이다.
1832년, 시 중심부 자치도시(City of London) 자체 경찰인 런던자치도시경찰(London City Police) 설치했다. 1839년 명칭을 시 이름과 같게 City of London Police로 변경했다.
러시아, ‘혁명의 싹’ 싹둑 잘랐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했으나 실패. 철수할 때 러시아 군이 파리까지 추격했다. 그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의 공기를 마셨다.
병사들은 농노農奴였다. 귀족출신인 장교들은 승리의 1등 공신인 그들 농노가 자기들 지주의 땅에 묶여있는 노예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받아들였다.
귀국 후 ‘러시아가 이래선 안 된다. 입헌군주제나 공화정으로 가야 한다. 농노는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 장교들이 비밀결사 만들었다.
1825년 황제 죽고, 새 황제가 즉위하는 혼란기를 틈 타 거사를 계획했다. 그해 12월 26일 개혁파 장교가 지휘하는 2개 연대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 집결했다. “황제는 물러나라!”
이게 바로 12월당의 봉기(Decembrist Revolt)다. 이른 아침부터 정부군과 대치하고 오후 4시 새 황제가 지휘했다.
총으로 몇 명 죽여서 되는가. “대포로 하라. 포병! 앞으로!”
발사! 연이어 작렬하는 포탄으로 유혈이 낭자했다. 너도나도 꽁꽁 언 강으로 도주했다. 그쪽으로 쏴라! 얼음 깨졌다. 추운 물에 빠져 얼어 죽었다.
“자, 이제 경찰이 나설 차례요.” 내무장관에게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지시했다. “내가 대포 쐈듯이 하시오. 일망타진하시오! 아시겠소?” 한 그물로 몽땅 잡아들였다.
체포된 귀족과 장교 557명, 기소 121명, 공개 사형 5명, 투옥 31명, 시베리아 유형 85명. 모두 재산 몰수. 빈털터리 됐지만 부인도 따라갔다.
1856년 석방했다. 그러나 예전에 살던 곳에서의 거주는 금지되고 시베리아에 정착했다. 학교와 병원 열었다. 봉사하며 일생 마쳤다. 동토凍土 문화의 토대가 됐다.
1825년의 실패원인은 무얼까? 주동자급이 잘못될 경우의 처벌과 기득권박탈이 두려워 배반했다. 공안경찰에게 세부사항까지 속속들이 알려줬다.
전혀 다른 시대가 왔다
유럽으로 가보자.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전쟁 없는 ‘평화의 정치’(politics of peace)가 끝났다. 1815년부터 1848년까지 힘의 균형에 의한 안정이 끝났다.
1849년부터는 프로이센=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입김에 휘말리는 세상이 됐다. 힘 있어야 말발 서는 ‘권력의 정치’(politics of power) 시대로 갔다.
1866년 5월 7일 오후 왕궁에서 집으로 가는 그에게 청년이 다가왔다. 권총 방아쇠 당겼다. 총탄 맞은 비스마르크는 냅다 암살기도자의 손목을 잡았다. 비틀었다. 권총은 땅에 떨어졌다. 체포했다.
이 소식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누가 감히 이 무모한 사람의 말을 안 듣겠는가.
비스마르크는 아프리카 그 넓은 땅 한 뼘이라도 더 가지려고 혈안인 유럽제국을 불러 모았다. “A국은 여기, B나라는 저기 가지시오.” 고분고분 나눠가졌다. 힘이 땅따먹기를 중재했다.
유럽의 경찰들은 혁명열풍을 계기로 국경을 넘어 서로 도왔다. 국제형사경찰기구 즉 ‘인터폴’ 창설로 이어졌다.
인터폴 처음 목적은 도둑, 강도, 살인범 체포가 아니었다. 왕정을 전복시키려는 반체제 혁명세력-정치범, 암살범, 테러범-검거협력체제다. 내놓고 공조하지는 못했다. 은밀하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