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사회사] 미국경찰, 불공정·부정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인터폴 부총재 역임,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실패한 혁명가는 반역자, 정치범으로 전락해 쫒기는 신세 된다. 검거선풍에 잡히면 감옥->고문->복역 또는 처형되기도 한다. 조국은 살 곳이 되지 못했다.
체포 피해 미국행 배에 올라탄 5만명의 독일인이 1848년 미국에 도착했다. ‘48ers’ 즉 포티에이터즈다. 반체제운동 참가자들이라 대부분 고학력 전문직이다. 이듬해(1849년) 황금 캐러 캘리포니아로 간 사람들은 ‘49ers’라 부른다. 8만명에 이른다.
도망쳐 나왔으니 가진 건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리, 웅변 잘하는 입, 데모하느라 흔들어 대던 손뿐이다. 그러나 이런 게 남의 땅에서 밥 먹여주지는 않았다.
수중에 돈도 별로 없었다. 뉴욕은 이미 클 대로 큰 도시라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었다. 도로로, 운하로, 철도로 사통팔달 이어지는 아메리카의 십자로인 시카고는 틈이 조금 있을 듯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이곳 사정도 좋지는 않았다. 식민지시대에 와서 터 잡은 구이민舊移民이 다 꿰차고 있었다.
새로 온 사람들이 먹고 사는 방법
1837년 4200명이 city of Chicago를 만들었다. 이민 몰려와 커져갔다. 1890년 들어선 미국에서 뉴욕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 됐다. 1백만 인구의 절반인 50만이 배 타고 온 사람들이다. 계속 몰려들었다.
막일 다니기에는 어디가 좋은가. 교통 편리한 시 중심가다. 다들 그곳으로 모였다. slum=빈민가=ghetto가 됐다. 판잣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일거리 없어 굶어 죽지 않으려고 미국에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굶어 죽다니? 억울하다. 그럴 수 없다! 그럼 무엇으로 먹고 사나. 역사 유구한 생계수단 즉 범죄다.
일찍 와서 일찍 그 세계 들어 간 고향선배들이 조직 만들어 키웠다. 처음에는 술집 하나 차렸다. 이어 둘 셋 늘려 나갔다.
술집과 동행하는 업종, 바로 도박에 손 뻗쳤다. 숙박업과 매춘에도 나섰다. 먹고 마시고 놀면서 돈 쓰는 영업을 장악해 나갔다.
범죄조직과 이민집단의 공존
종업원은 고향사람으로 채워 일자리 줬다. 아이 병원비나 집세도 도와줬다. 월세가 너무 높다고 하면 집주인과 교섭해 낮춰준다.
술 취해서 해롱대고 주먹다짐이나 교통사고로 경찰에 체포되면 꺼내준다. 시민권 취득에 어려움 있다면 나서서 해결해 준다. 크리스마스에는 칠면조 선물한다.
이런 일이 이역만리 타향살이 이민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나같이 그저 울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처사다. 어찌 이민사회가 보스중심으로 뭉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에 공짜 없다. 선거 때 왕초가 지시하는 대로 보호자인 시의원에게 표 몰아주어야 한다. 줄서서 투표장 간다.
몰표로 당선시키고->사례로 영업권 보장받고->경찰단속 재갈 물리고->조국동포 어려움 해결한다. 돈과 정에 의존하는 민주정치다.
한표 한표를 소중하게
아일랜드출신 이민자들은 멸시 당했다. 신문 구인광고엔 “No! Irish-Catholic!” 아일랜드인의 응모는 사양한다는 문구가 버젓이 들어가 있었다.
모멸당하는 신세 탈피하는 도구가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선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표=힘이라는 등식을 알아 차렸다. 유감없이 발휘했다.
1880년 뉴욕시장 선거, 1884년 보스턴시장 선거에서 Irish-Catholic을 당선시켰다. 시의원에도 다수가 당선됐다. 의회를 장악하였다!
시행정과 시의회를 장악한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임용권과 예산권으로 법집행자 경찰관을 아일랜드 사람으로 채워나갔다. 고향사람은 단속하지 말아야 해! 알았지?
경찰이 정치에 물들고 뇌물에 젖었다. 오늘날에도 미국경찰은 인종과 신분을 차별하는 불공정과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유산(遺産, legacy)이다.
불공정과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나라!
이 작은 불합리함을 깨뜨리는데
저도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귀한 글 잘 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