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사건…범인날조와 진범은닉

드레퓌스사건을 영화화한 <장교와 스파이> 포스터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 통일과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저지하려고 했다. 7월 19일 선전포고했다.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전쟁의 문 열었다. 프로이센-프랑스(보불) 전쟁이다. 9월 2일 나폴레옹 3세 포로 됐다. 항복했다.

1871년 1월 18일 정오 패전국의 베르사유궁전에서 군악대 드럼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그 여운 속에서 새로운 독일제국(제2제국) 선포했다. 제국황제에 빌헬름 1세 등극선언하고 수상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 취임했다.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베르사이유궁전은 역대 프랑스황제의 거성이었다. 혁명 발상지였다. 독일인들이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독일제국황제 옹립한다? 치욕이다. 불구대천의 원수다!

48년 후인 1919년, 1차대전 패전국 독일을 여기로 불러 베르사유조약 조인케 만들었다. 복수했다.

희생양 필요했다

1871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조약은 패배자에게 강요된 휴전조건 치곤 가혹했다. 나폴레옹에게 독일 짓밟혔던 원한 담겼다. “배상금 50억 프랑 내라.”

프랑스인들은 이 악물었다. 돈 될 물건 다 모았다. 기부금과 합쳐 3개월도 채 안 돼 물어냈다.

열흘 후인 5월 28일 파리코뮌도 무너졌다. 정치가와 군인과 부르주아에 대한 불신 속에서 스스로의 미래를 책임질 노동자빈민 자치정부를 시민들이 3월 28일 수립했었다. 두 달 만에 학살로 끝났다.

프랑스사회는 이 일로 우익과 좌익으로 완전히 나뉘었다. 두 진영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파인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극화된 사회사상 체제와 독일인에 대한 증오감이 1800년대 후반을 지배했다. 여기에 반유대주의 가세했다. 이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사건 발생했다. “간첩이다! 독일 프락치다!”

대사관 쓰레기

1894년 프랑스 군정보부, 파리에 있는 독일대사관 프랑스인 가정부를 매수했다. 쓰레기 모아서 가져오는 일이었다. 쓰레기學(garbology) 즉 쓰레기 속에서 정보 캐내기다.

그해 9월. 쓰레기통에서 여섯 조각으로 찢어진 문서 발견했다. 돈 되겠다 싶어 갖다 줬다.

분석 결과 프랑스군 포병부대 신형대포에 관한 서류-군사기밀이었다. 내용으로 봐서 일선 포병대가 아닌, 육군 참모본부에서 작성한 내용이었다. 말미의 서명이니셜은 D였다.

분석내용을 토대로 스파이 이미지 그려졌다. 참모본부 소속-포병장교-이름이 D로 시작되는 자였다. 이 조건 충족하는 데다가 유대인이고 고향이 독일영토로 바뀐 알자스. 누구나 고개 끄덕였다.

11월 19일 대역죄로 체포했다. 12월 19일 재판 개시. 1895년 무기징역, 얼마 뒤 이듬해 1월 악마의 섬 감옥에 투옥했다.

범인날조와 진범은닉

에밀 졸라

에밀 졸라는 40대 중반에 들어선 소설가였다. 이미 문명文名 날리고 있었다. 지난 몇년간 군사법원의 잘못된 운영에 대하여 고뇌했다.

그가 D사건에 관하여 입수한 정보는 수사와 소추와 재판이 100% 조작됐다고 알려줬다.

(1)당사자 D가 내내 한 말 “Show me at least the proofs of the infamous act you pretend I have committed”(최소한 나를 엮어 넣으려는 사건의 증거는 보여 줘야 할 거 아니냐.)

(2)참모본부 정보부 방첩과장 조르쥬 파카로 중령이 1896년 진범이 페르디낭 에스테리지 소령이라는 증거 확보하게 됐다. 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반응은 이랬다. “너는 왜 그 더러운 유대인을 도와주려고 난리 치냐?” “진실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새 보직 줄 테니까 거기서 더 철학하라.” 아프리카 식민지 근무로 좌천시켰다.

(3)정보부 앙리 소령이 파카로 중령이 가지고 있던 진범증거 고쳤다. 에스테리지 소령이 빠져 나가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소문이자, 프랑스인은 웬만한 건 사실로 다 알고 있었다.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군 당국만 모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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