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발자취 걷다③] 회혼일 아침 조용히 숨을 거두다
[아시아엔=황효진 공인회계사, 인천도시공사 전 사장] “정약용은 회혼일 아침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801년 11월 24일
영암 월출산 누리령을 넘어 강진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날 백제의 남쪽 변방으로 지역이 비루하여 풍속이 색달랐다. 백성들은 유배 온 나를 보기를 마치 큰 해독처럼 여겨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달아났다.
그런데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이윽고 나는 창을 닫아걸고 밤낮으로 혼자 있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북풍에 흰 눈처럼 불어 날리어
남으로 강진 땅 주막집에 이르렀네
작은 산이 바다를 가려줘서 다행이고
빽빽한 대나무를 꽃으로 삼으려네
장기 있는 땅이라 겨울옷 벗어내고
근심이 많으니 밥술 더욱더 마시네
나그네 수심을 그나마 녹이는
건설 전에 붉게 핀 동백꽃이라
1802년 12월 12일
막내아들 농아의 부음이 전해졌다.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비참하고 비참하다. 3년 전 그가 태어났을 때 나의 근심이 깊어 농아(農兒)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후 화가 근심한 대로 닥쳤기에 너에게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려 했는데, 이는 그렇게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신유년 겨울에 과천의 정사에서 너의 어미가 너를 안고 나를 전송할 때 너의 어미가 나를 가리키며 ‘나의 아버지시다’라고 하니, 네가 따라서 나를 가리키며 ‘나의 아버지시다’라고 했으나, 너는 아버지가 아버지인 줄은 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1803년 1월 1일
신유교안이 있은 지 벌써 햇수로 3년이다. 6남 3녀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애는 2남 1녀뿐이다.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스러우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제 살아남은 애들마저 스스로를 폐족으로 생각하여 자포자기하며 살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폐족은 오직 벼슬길에 금기가 있을 뿐이다. 폐족이라고 해서 성인 또는 문장가가 되거나 이치에 통달하는 선비가 되는 데 하등의 지장이 없다.
오히려 폐족의 장점도 많다. 그것은 과거 시험에 연연하지 않아 진정한 학문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빈곤하고 궁약한 고통이 심지를 단련시키고 지혜를 얻게 하여 인정과 물태(物態)의 진실과 거짓을 두루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폐족 중에 재주 있고 걸출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렇다고 하늘이 폐족에 재주 있는 사람을 내어 폐족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영달하려는 마음이 학문하려는 마음을 가리우지 않으므로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능히 진면목과 참다운 골수를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민으로서 학문하지 않는 자는 다만 용렬한 사람이 될 뿐이지만, 폐족으로서 학문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패려하고 비루하여 가까이할 수 없는 자가 되어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된다.
혼인 길이 막혀서 천민과 장가들고 시집가게 될 것이요, 한두 세대가 지나 물고기 입이나 강아지의 이마를 한 자녀가 나오게 된다면, 그 집안은 영영 끝나게 되는 것이다.
부디 살아남은 아들딸들이 아비의 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1813년 7월 14일
3년 전 병든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었다.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붉은색은 바랬고 노란색도 엷어져 있었다.
일전에 이를 재단해 작은 첩을 만들어 손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들에게 전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쓰고 남은 하피첩(霞?帖)을 다시 꺼내 들었다. 천 조각에 매화나무와 새 한 쌍을 그리고 시 한 편을 써서 시집가는 딸에게 보낸다.
훨훨 나는 저 새가
내 집 뜰 매화에 앉아 있네
꽃향기 짙어서 찾아주었나
여기에 머물며 살면서
화락한 집안을 가꾸어 보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으리라
1816년 6월 16일
약전 형님의 부음을 받았다. 아! 어질고도 궁하기가 이 같은 분이 있었겠는가? 돌아가심이 원통하여 울부짖으니 눈물을 흘리는데 또 무슨 말을 하리요. 외로운 천지간에 다만, 약전 형님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 돌아가셨으니 내 비록 터득한 것이 있다 한들 어느 곳에서 입을 열어 말하겠는가.
사람에게 지기(知己)가 없으면 죽은 것만 못하다. 아내도 지기가 아니고 자식도 지기가 아니고 형제 친척도 지기가 아니다. 지기인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하겠느냐?
경집 240책을 새로 장정해서 책상 위에 놓아두었는데 내가 장차 이것을 불태워버렸으면 한다. 율정에서의 이별이 천고에 애통하여 견디지 못할 일이 되어 버렸구나!
1836년 2월 19일
내 나이 75세이다. 병세가 심한 것을 보니 이제 살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3일 후면 아내와 혼인한 지 60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이다.
육십년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지났는데
복사꽃 핀 봄빛은 신혼시절 같구나
생이별과 사별은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기쁨 길어 은혜 감사하네
이 밤 읽는 목란사 소리 더욱 다정하고
그 옛날 하피첩엔 먹 흔적 아직 있네
갈라졌다 합해지니 진짜 나의 모습이라
합환주(合歡酒) 술잔 남겨 자손에게 물려주리
정약용은 회혼일 아침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