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날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박노해

아침이면 목 마른 꽃들에게 물을 준다
저녁이면 속 타는 나무에게 물을 준다
너희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구나
서로를 경계하지도 멀어지지도 않았구나

벌들은 꽃과 꽃을 입맞춰주고
바람은 서로 몸을 기울여 손잡아주고
무더위에도 속 깊은 만남으로
살고 살게 하고 살아가는구나

복숭아는 대지의 단물을 빨아올리고
체리 자두 블루베리는 달콤하게 익어가고
벼 포기는 자라고 감자알은 굵어지고
사과알은 당차게 가을을 향해 걷는구나

코로나 뒤의 검은 그림자를 뚫어보며
먼 곳을 바라보는 내게 나무가 그랬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쉽게 달관하거나 위로받지 말라고

좋은 날도 나쁜 날도 그냥 가지 않는다고
날들은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내게 안겨주고 내게 남겨주고
내 안을 꿰뚫고 지나간다고

무력한 인간의 날들이여
불가촉 세계의 날들이여
너는 나의 무언가를 헤쳐놓고 가는구나
너는 내게 무언가를 심어놓고 가는구나

나는 하루하루 날을 받아 사는 생
어떤 날도 피할 수 없기에
어떤 날도 내 안에 모신다
나 또한 무언가를 심어나간다

하루하루가 내게는 결정적인 날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는 귀인이시니
푸르른 걸음으로 너를 향해 가야겠다
무더위 속에서도 강인한 저 나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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