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자화상 그리기’ 박노해 “고난도 비난도 치욕도 다 받아 사르며 가라고”
광야의 봉쇄수도원 수녀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모습이라며
몽당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이게 나야, 웬 이쁜 외계인,
혼자 웃다가 번쩍 다시 보니
귀가 이렇게 유난히 큰 것은
말 잘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너무 작아 미약한 말에도 나직이 귀 기울이라고
눈이 이렇게 푸른 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가지라고
먼 저편을 바라보는 눈 푸른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슴에 불덩이를 그려 넣은 것은
침묵 속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품고 가라고
고난도 비난도 치욕도 다 받아 사르며 가라고
발이 이렇게 넓은 것은
온 세상을 누비며 배우고 깨치는 순례자가 되라고
발바닥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며 닳아져 가라고
지금 내 자화상을 그려본다면
큰 입에 작은 귀, 언 가슴에 좁은 발일 텐데
힘 있고 유명한 것만 쫓는 검붉은 눈일 텐데
부끄럽네요 수녀님
벽 속에서 살다 말없이 묻혀갈 당신을 생각하며
보내주신 그림 따라 살아갈게요
언젠가는 저도 예뻐진 자화상을 그려 보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