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⑥] 부산고 시절 만난 안중근과 김형석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시련을 겪는다. 시련은 곧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내게는 그 시련과 기회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찾아왔다. 부산고에 들어가 보니 동기들은 벌써부터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등 거제도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속에서 내 공부는 못 하고 입주 가정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괴감도 들고 학업을 따라가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결국 2학년이 되자마자, 부산 대연동에 살고 있는 형님의 단칸방에 합류했다. 그런데 2학년 1학기 5월 중간고사 때 이틀째 시험을 치고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병원에 가 보니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진단이었다. 폐에 동공이 두 개가 생겼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부산에서는 치료받을 상황이 아니어서 결국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친구들은 좋은 환경에서 부모 지원을 받으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데 나만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동네에 있는 의사한테 일주일에 한 번씩 주사도 맞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1년이라는 휴학 기간은 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학교 공부에서 벗어나 다양한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책은 다 읽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동네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서 옆 동네로 책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나중에는 읽을 책이 없어서 『세계대백과사전』을 비롯해서 『의학대백과사전』까지 서너 번씩 읽었다.
그때 읽은 책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책이 있다. 100세인 지금도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시는 김형석 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와 같은 책이다. 그 당시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은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혔다. 이 책들은 그 당시의 감수성이 풍부한 내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가 깊은 철학적 내용을 담아내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 책을 펼쳐 놓고 “존재의 의미는 사랑이다.”,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은 고뇌 어린 열정.”, “어떻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허무를 넘어 다시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장을 읽을 때면 마음 깊은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열 번씩은 읽은 것 같다.
특히나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나 자신의 삶만 정지된 것 같은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책이 주는 위로와 성찰은 큰 힘이 되었다. 역경이 왔지만 당당하게 부딪쳐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과 사랑의 대화』 후반부에는 「어느 구도자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신부와 그를 연모하는 제자의 이루어지지 못한 러브 스토리가 실려 있기도 했는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애틋한 마음에 사로잡혔던가.
휴학 기간 중 읽은 책들은 나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었다. 매일 마음 놓고 철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하다 보니 인문학의 기본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휴학 기간이 아니었다면 고등학교 시절에 입시에 쪼들려 독서하는 시간은 꿈조차 꿀 수 없었으리라. 이때 읽은 책들이 훗날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일일부독서(一日不讀書)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생긴다”고 한 말을 실감하던 때이기도 했다.
또 휴학하는 동안 나는 고향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고향의 바다와 산을 벗 삼아 산책하고 운동하면서 향토의 내음을 한껏 맡을 수 있었다. 독서를 하고 건강 회복을 위해 운동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고향 사랑이 휴학 기간에 더욱 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 김형석 교수가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낸 것을 보면서 노교수인데도 여전히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모습에 어찌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휴학 시절에 감동을 주고 인생을 풍성하게 해 준 김형석 교수가 100세가 되어서도 건강을 과시하며 강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