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⑨] 40년전 진주여고에서 생긴 일
[아시아엔=이기우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가끔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조용조용 놀다 가면 상관없지만 그렇게 노는 아이들이 어디 있을까. 아직 재학생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운동장에 들어온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면 교장 선생님이 화를 내게 마련이다.
일하는 용원 아저씨를 시켜 아이들을 내쫓게 하면 아이들이 그 기세에 몰려 나갔다가 금세 다시 들어와서 운동장을 휩쓸고 다니기 일쑤였다. “너 이놈들, 나가라고 했지. 빨리 안 나가?” 하는 소리가 서무실에까지 들릴 정도로 고함을 쳐도 아이들은 미꾸라지처럼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한번은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아이들을 쫓아 보겠노라고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아이들을 잡을 듯이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 어서 이리 와!” 나는 용원 아저씨와 반대로 아이들에게 저리 가라고 외치지 않고 이리 오라고 외쳤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확률이 줄어들었다. 저리 가라고 말하면 반발심이 생겨서 더 달려들지만 이리 오라고 하면 웬일인지 다시 오기 싫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1970년대 후반 경남교육청에 근무하다가 진주여고 서무과장으로 나가 있을 때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학교에서 기성회를 조직했다. 학생들의 과외 공부를 돕기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다. 8천만원을 목표로 했지만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천5백만원이 모였다. 다급해진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살펴보니 전부 돈 많은 사람 위주로 임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돈 많은 부모일수록 적극적으로 기성회에 참여해서 기부금을 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바로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이 한눈에 보였다. 그래서 나는 열 개 반 담임 선생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담임 선생님들이 관심을 기울여 초청할 분들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학부모님들이어야 합니다. 먼저 장녀인 아이들, 다음으로 반에서 10등 이내인 아이들, 마지막으로 앞의 두 조건을 충족하면서 경제 수준이 높은 분들을 모셔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분들에게 연락을 돌리십시오. 그다음부터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날짜도 잊지 않았다. 1979년 4월 13일. 그날을 ‘학교 방문의 날’로 정했다. 무조건 기성회비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먼저 알리고, 자연스럽게 기성회비를 모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학부모들을 모시고 1년 치 입시 지도 계획을 성심성의껏 브리핑했다. 질문이 나오면 대답을 했고, 추가할 부분이 있으면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렸다.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까지 대접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자기 자식을 열심히 공부시키겠다는데 어느 학부모가 토를 달겠는가. 그리고 학부모들이 돌아가는 길에 ‘진주여고 학교 방문의 날’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타월을 나누어 드렸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9천만원의 기성회비를 모았다! 최초 기성회비의 세 배가 되는 금액이었다. 모두 다 생각을 바꾼 결과였다. 무조건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처음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 당시 시대 분위기상 여학생을 대학까지 보내 공부시키겠다는 학부모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장녀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공부를 더 잘할 가능성이 있는 장녀를 둔 학부모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그것을 뒷받침할 정도가 된다면, 기성회에 임원으로 참여할 확률은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학부모를 학교로 초청해서 입시 설명회식으로 그 마음을 설득하는 것은 그 전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발상 또한 학부모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물론 학부모도, 학생들도 모두가 이기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 타성에 젖어 늘 하던 대로, 아무 전략 없이 그대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연구하고 파악한 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승패의 관점에서 이분법적으로 접근하거나 내가 이기고 너는 지는 식의 ‘이해관계’를 따져 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내가 모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내 스타일이었다.
진주여고에서 내 방식이 큰 성공을 거두자 곧바로 진주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남자고등학교는 여자고등학교보다 학부모의 관심도가 훨씬 높으니 진주고등학교로 와서 자기를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음 근무지가 정해진 상태였다. 교육감이 창원기계공고에 가서 일을 도우라는 명령을 주신 뒤였던 것이다. 그때 진주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