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④] “느그 집 기제가 언제드노?”
[아시아엔=이기우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내 또래의 사람들이 어릴 적 어렵게 산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나와서 살게 되었지만 고향 거제도에 대한 추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물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늘 배가 고팠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쌀밥을 원 없이 먹어 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 간혹 쌀이 생기면 고두밥을 짓는 데 들어가기 일쑤였다.
고두밥이란 술을 빚기 위해 물기 없이 되게 짓는 밥을 말한다. 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하셨기에 집에서 술을 내리기 위해 고두밥을 지었다. 또 가끔 ‘웁쌀’이라고 해서 보리밥 지을 때 그 위에 쌀 한 줌 얹어 밥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아버지 밥그릇에 먼저 들어가고 나면 나머지는 보리밥이랑 휘휘 섞이게 마련이고 내 밥그릇에서 쌀알 찾는 것이 보물찾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내게도 기다려지는 날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제삿날이었다. 제삿날에는 그래도 쌀밥과 기름진 음식이 제상에 올라가고 생선에 전이라도 주변 이웃들과 나누어 먹게 되니, 늘 배를 곯던 아이들로서는 이보다 반가운 날이 또 없었다. 이 때문에 늘 어느 집에 제사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느그 집 기제가 언제드노?”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마침 친구네 집 제삿날이 되면 초저녁부터 눈을 부릅뜨고 제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보통 제사가 끝나는 시각이 새벽이다. 새벽 한두 시쯤 음식을 돌리는데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간신히 졸린 눈을 비비며 버텨 보지만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기 일쑤였다. 깜빡 잠이라도 든 날이면 모든 게 도루묵이었다. 아주 잠깐 잔 것 같은데 아침이 되어 있었다. 부엌으로 달려가 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형제 많은 집에서 그 음식이 아침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억울한 생각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런 집안 형편에 늘 하나라도 더 나를 챙겨 주려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머니가 특별히 챙겨 주신 별식이 하나 있다. 대접에 달걀을 하나 깨서 풀고 거기다 참기름을 넣어 휘휘 저은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아들 영양 보충을 시켜 주셨다. 없는 집에서는 이런 음식도 정말 별미 중의 별미였다. 생각하면 저절로 침이 넘어간다. 달걀과 참기름이 뒤섞인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버지는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힘이 장사셨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똥장군을 지고 밭일을 다니실 정도였다. 워낙 애주가다 보니 술 좋아하는 친구분들과는 흥겹게 어울리시는 일이 많았지만, 자식들에게 애정 어린 표현을 하는 분은 아니셨다.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내게 해 주신 음식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때 결핵성 늑막염으로 거제도 집에 내려와 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들으셨는지 결핵에는 개가 좋다고 황구 한 마리를 사 가지고 오신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개소주라고 할 수 있겠다. 한약과 함께 푹 고아 계속 먹었다.
어떤 날은 밤에 얼핏 잠을 깨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저놈 자식이 내 반만 닮아도 몸이 좋을 긴데.” 아버지는 나를 두고 그런 넋두리를 하고 계셨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을 그때 알았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고등학교 때는 병약했던 내가 지금은 어디를 가도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너무 큰 셈이다. 이제 언제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의 음식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