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③] 거제 연초초등학교 시절, “아~, 그 운동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공무원’. 내가 교육부 장관 시절에 했던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다시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이해찬 전 국무총리)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일에의 열정, 교육에 관한 전문적 식견, 그 밖에 그가 신중히 여기는 따뜻한 인간관계”(김황식 전 국무총리) “하위직 공무원에서 시작하여 차관까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박성훈 인천재능대학교 이사장)
이기우 전 재능대총장에 대한 평가다. 그렇다. 이기우 전 총장이 작년 가을 낸 <이기우의 행복한 도전>(알파미디어)에 두명의 전직 국무총리와 재능그룹 회장이 쓴 추천 글은 되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시아엔>은 이 전 총장의 자서전 격인 <이기우의 행복한 도전>을 연재한다. 또한 아시아엔 영어판에도 번역, 게재해 영어권 독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기우 총장과 같은 공직자가 해외에서도 많이 배출됐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편집자>
[아시아엔=이기우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특히 돼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라 초등학교에서도 돼지를 키웠다. 학교 운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하는 일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돼지 열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이 일을 5학년이 맡아서 했다. 방학이 한 달이라면 학생들이 동네마다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돼지를 키웠다. 한 주는 연사리, 한 주는 죽토리, 다음 한 주는 다공리…, 이런 식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공리에 살았는데 우리 동기 다섯 명이 사육 당번이었다.
우리는 시장통에서 얻어 온 구정물에 동물 사료용 분유를 타서 돼지에게 먹였다. 그런데 한번은 사료용 분유가 상해서 누렇게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늘 배가 고팠던 시절이다. 분명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는 것이 아닌가! 그걸 다섯 명이 나누어 다 먹고 말았다. 결국 돼지한테 먹일 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6학년 선생님한테 크게 혼났다. 그래도 배가 아팠다는 기억조차 없으니 얼마나 맛있게 사료용 분유를 먹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6학년에 올라가서는 우연히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부는 늘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운동은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만 좋아하기는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축구부 선생님이 나를 좋게 봐서 축구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네, 알겠습니다.” 축구부에 들어가니 운동화를 주었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이니까 대다수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였다. 운동화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부잣집 아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축구할 때만 운동화를 신고 집에 갈 때는 벗어서 들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닳을까 봐서 좀체 신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내 또래의 많은 사람이 이런 추억 하나쯤 있을 것이다. 축구하고 집까지 십 리 길을 운동화 들고 걸어 다니면서도 매일이 즐거웠다.
축구부에 들어가고 보름이나 지났을까. 축구부 담당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기우 니는 아무래도 공부하는 게 낫겠다.” 그 말을 듣는 것은 괜찮았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나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니 지난번에 가져간 운동화 있지. 그거 가져온나.”
지금 생각해도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그때 운동화를 더 많이 신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운동화를 다시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한동안 학교에 가면 늘 운동화 생각이 났다. 그렇게 허무하게 돌려줄 거면 원 없이 신어 보기라도 했으면 아쉬움이 덜했을 텐데……. 어려운 시절 가난이 서러웠던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지금도 그 서러움에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다.
부산고에 다닐 때는 집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이 아니었기에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때 걸린 결핵성 늑막염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혼자 버티며 공부하다가 무리를 해서 생긴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년을 휴학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정말 운이 좋게도 친구네 집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다락방이기는 했지만,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와 친구 부모님이 오갈 데 없는 나를 생각해서 자기 집에 머물라고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니 체육 시간에 체육을 한 기억이 없다. 몸이 아팠기 때문이 아니라 체육복이 없어서였다. 체육 담당 선생님은 “체육복 안 입은 놈은 운동장에 나오지 마라”고 엄포를 놓았다. 학교 매점에 체육복을 갖다 놓았지만 나에게는 체육복 살 돈이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체육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교실에 앉아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그런 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점심시간도 그렇다. 정말 고맙게도 친구 어머니가 내 도시락까지 싸 주셨다. 그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런데 겨울이면 친구들은 매점에 가서 뜨거운 국물을 사서 밥과 함께 먹는 일이 잦았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그 국물을 먹어 본 일이 없다. 그런 것이 서러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소위 말하는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어려웠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렇게 어렵고 서러운 시절도 견디어 냈는데 이것 하나 못 할까 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그러면 또 꿋꿋이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다. 가난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어린 시절 가난했다고 모두가 잘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려웠던 시절의 경험을 지금 삶의 힘으로 어떻게 이끌어 오는가가 중요하다. 그럴 때 가난은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