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⑩] ‘이진선 이후에 이기우’···교육부 서무계장이란 자리
[아시아엔=이기우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33세가 되던 1981년에 교육부(당시 문교부)에 파견 근무를 나갔다가 도 교육청으로 복귀했다. 파견 근무를 나갔을 때 내가 맡은 일은 정화담당관실 사무관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고 한창 청탁 배격 운동을 할 때였다. 모든 분야에 거품을 없애고 부정과 비리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의지로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정화담당관실이었다. 이 조직은 모두 전국 각지의 일 잘하는 공무원들이 파견되는 자리였다.
정화담당관실에 파견 갔을 때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지 않고 창원에 집이 그대로 있었다. 그 당시 아들이 창원에 있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닐 때였는데 공교롭게도 반장이 되었다. 내가 청탁 배격 운동, 촌지 배격 운동을 진두지휘하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아내에게도 아이 학교로 절대 찾아가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몇 개월 있다가 반장이 바뀌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아이가 반장이 되면 엄마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리저리 학교 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도맡아 하던 시절이었다.
반장 엄마가 학교에 코빼기도 안 비치니 선생님으로서는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결국 반장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아이한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그 입장을 견지했다. 이 일이 정화담당관실에 두루 알려졌고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게다가 일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35세가 되던 1983년에 교육부 총무과 서무계장으로 전격 발탁된 것이다. 이건 정말 큰 사건이었다.
고졸 9급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32세의 나이로 5급 사무관에 승진한 것도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방 도 교육청 소속 공무원이 다시 1년 뒤에 중앙 부처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물론 걱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부에서 일하던 공무원들이 나를 질시와 텃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불필요한 우려에 불과했다. 내가 맡은 직책이 바로 총무과 서무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살림 사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장관이나 차관이 조찬을 하거나 점심을 먹을 때, 외부 모임을 가질 때 전부 뒷바라지하는 자리이다. 장관 집에 전화기를 교체해 주거나 기사를 데리고 가서 전기배선을 갈아 주는 일도 했다. 그야말로 몸을 던져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리이지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가 결코 아니었다.
교육부 서무계장 시절, 내 선임자 중에 전설적인 분이 있었다. 이진선이라고 하는 분이었다. 이진선 계장이 얼마나 제 역할을 잘했는지 이분이 국회에 들어가면 국회의원과 직원들이 이 계장에게만 인사를 할 정도로 장차관뿐만 아니라 국회까지 다 잡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진선 계장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새마을호가 막 생겼을 때의 일이다. 장관이 부산 출장을 간다 하면 잴 것도 없이 바로 이진선 계장에게 연락이 갔다. 그러면 순식간에 새마을호 표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이 계장이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장관실에서 총무과장을 찾았다. 연락을 받은 총무과장이 허둥지둥 서울역 역장실에 들어가서 “교육부 총무과장입니다. 장관님의 부산 출장 때문에 새마을호 표가 필요합니다.”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서무계장이 역장님하고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데요?” 알고 봤더니 이진선 서무계장이 어느새 연락을 받고 총무과장보다 먼저 출동해서 표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빠릿빠릿하게 일을 잘하던 사람이 바로 이진선 계장이었다. 그런데 이진선 계장이 떠난 뒤로 두세 명의 새로운 계장이 거쳐 간 뒤에 적임자를 찾던 중 바로 내가 발탁되어서 들어간 상황이었다. 팔방미인이 되어야 하고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였다.
중앙 부처인 교육부는 대학을 담당하거나 시도 교육청을 담당하는 등 중요한 권한을 쥐고 있는데 서무계장을 희망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그 자리에 가려는 사람도 없었다. 책임을 맡기려고 해도 누구 하나 하겠다는 사람이 없고 다 못 하겠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나한테 기회가 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그러나 나는 서무계장을 맡게 된 것이 기뻤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고 큰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 내가 지방 도 교육청에서 서울로 오면서 정책 부서나 권한 있는 부서로 바로 가게 되었다면 기존 사무관이나 6급들이 나를 많이 흔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서무계장은 누가 봐도 궂은일을 하는 자리이고, 헌신해야 하는 힘든 자리였기에 그만큼 저항이 적지 않겠는가. 나로서는 일석이조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주어진 직책에 맞게 내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면 되는 것이니 누구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나는 당당하게 일을 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들어가서 정말 많은 일을 했다. 내 주관하에 공무원 모내기 행사와 벼 베기 행사도 진행했다. 관광버스에 공무원들을 싣고 가는데 명단이 나오면 버스에 올라 인원 체크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한번은 어떤 낯선 사람이 맨 앞좌석에 앉아 있기에 명단을 내밀면서 이름을 체크해 달라고 했더니 “내 이름은 없는데?” 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촉박해서 다른 사람들을 먼저 체크하고 버스 뒤로 가서 아는 직원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털어놓았다.
“아니, 저 양반은 누군데 체크도 안 하고 말이야 저렇게 앉아 있는지 모르겠어.” 내 말과 동시에 직원들이 웃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다른 부서의 국장이었다. 보통 국장은 업무용 승용차로 오는데 이분은 직원들이 이용하는 관광버스에 함께 탄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찾아가 사과를 했다. 그때가 바로 내가 막 계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신출내기니까 잘 몰랐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실국장 회의를 하면 연락을 돌리는 것도 내 일이었다.
한번은 긴급 소집이 있어서 연락을 돌리는데 대학정책실장이 연락이 안 되는 게 아닌가. 그때는 삐삐 시절이어서 전화도 할 수 없었다. 황급히 실장실에 올라가 보니 삐삐가 책상 위에 있었다. 아무리 해도 연락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던 생각도 난다. 아무튼 이런 일까지도 전부 도맡아 하는 게 바로 서무계장의 몫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정말 힘들었다. 웬만해서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나에게도 너무너무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자리였다. 그런 이유로 서무계장 자리는 보통 교육부 안에서도 1년만 하면 바꿔 주는 자리로, 그리고 고생한 의미로 그다음 자리는 좋은 직책으로 영전하는 자리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나는 1년 6개월이 넘게 계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큰 결심을 하고 총무과장을 찾아갔다. 그러자 총무과장은 나를 보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사무관 꼭 가야겠어? 나 좀 더 도와주면 안 되겠나? 이 사무관 없으면 내가 참 힘들어. 6개월 더 해 주면 내가 고생한 보답을 할게.” 그런 이유로 6개월 더 계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옮긴 자리가 바로 교육행정과 주무사무관이었다. 교육행정과는 보통교육국의 주무과이자 교육부 보통교육국 내 다섯 개 과 중에서도 주무부서에 해당한다. 다섯 개 과면 사무관만 열대 여섯 명이 된다. 주무과라서 근무 성적 평정을 모두 교육행정과에서 한다. 시도 교육감 인사도 담당하며, 국장을 뒷바라지하면서 근무 성적 평정을 내는 기초 자료를 만들어서 사인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서무계와는 달리 고유 권한을 가진 중요한 자리였다. 드디어 내 역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기뻤다. 더 기쁜 것은 2년을 채워 서무계장으로 일하면서 마침내 ‘이진선 이후에 이기우’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