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⑫] 고졸 출신이 고시 출신보다 승진 빨랐던 이유
[아시아엔=이기우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가끔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고졸 출신인데 행정고시 출신들이 가득한 공무원 조직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아마도 이 질문에는 학력이 낮으면 그만한 능력이 없지 않느냐는 의문과, 학력 때문에 차별이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움이 없었다. 편견에 근거한 것이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질문일지라도 내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공무원으로 살면서 한 번도 내가 가고 싶어서 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언제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먼저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데려다 쓰려고 한 결과 내 자리가 정해졌다. 일을 철저하게 하다 보니 어디서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자리가 정해지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러다 보니 고시 출신보다 오히려 승진이 빨랐다.
교육부에 있으면서 많은 장관을 모셨지만 그중에서도 윤형섭 장관 시절의 일이 먼저 생각난다. 그 당시에는 장관실에 과장들이 들어가면 늘 지적을 받고 나오기 일쑤였다. 결재 서류를 받아 들고 장관이 직접 빨간 펜으로 고쳐서 돌려주는데 어느 누가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 나는 교과서 담당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1년 반 사이에 결재받으러 들어가서 한 번도 퇴짜를 맞은 적이 없었다. 다른 과장들이 늘 놀라워하는 대목 중 하나였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잘 준비하면 된다고 말해 주기는 했지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한참 뒤에야 그 비밀이 밝혀졌다.
우연히 과장 서너 명이 함께 들어가서 각자의 서류를 결재받게 된 일이 있었다. 장관이 제일 먼저 내 서류를 들여다보고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이 과장, 이거 사인해야 돼?” 준비 없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순간적으로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관실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모든 사항을 완벽하게 점검했고, 내가 준비한 일에 확신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해야 합니다.” 장관도 곧바로 되물었다. “왜 해야 되는데?” “제가 충분히 검토했고, 잘 준비했고, 자신 있습니다.” 그 서류는 사실 교과서 가격에 관한 내용이었다. 장관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미리 알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이런 경우 윗사람은 준비한 직원이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최종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업무를 파악할 수 없는 까닭에 그것을 전문적으로 준비한 직원이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일은 어떻든 최선을 다해 준비가 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은 한 번 더 내게 물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믿고 할 수 있어?” 이럴 때 처음부터 구구절절 사안에 대해 상세하게 다시 설명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그렇지는 않다. 상사는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준비되었는지를 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당당하게 다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사인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장관은 한번 더 물었다. “그러면 나보고 눈 감고 사인하라는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제가 철저하게 했잖습니까.”
그때서야 장관은 웃으며 서류에 사인을 했다. 장관실 밖을 나오자 같이 있었던 다른 과장들의 입에서 “이기우 웃긴다. 장관에게 못 하는 말이 없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장관은 내심 그런 걸 좋아했다. 내가 어떤 일의 책임자가 되어 보니 그걸 알 수 있었다. 책임자가 되면 부하 직원들이 자신감 있게 다가올 때 그를 믿게 된다. 만약 의심 가득한 질문을 받고 “아, 장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가 어쩌고저쩌고 수정을 해서…….” 등등 쓸데없이 말을 늘어뜨리기 시작하면 신뢰가 떨어진다. 나는 이미 그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윤형섭 장관이 장관직을 그만두고 서울신문사의 사장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장관 시절에 비서실에서 같이 있었던 사람들을 불러 저녁을 먹는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의 반 정도는 내 이야기만 하더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만나 본 공무원 중에 이기우가 최고라는 칭찬이었다. 나는 내 철저한 준비와 자신감이 장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만큼 노력했기에 상대방 가슴에 가 닿을 수 있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 성실한 자는 준비된 자이고, 준비된 자는 믿음을 얻는다. 그 믿음이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