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⑮] 공보관의 최고 덕목 ‘신뢰’

지금은 사라진 가판신문. 주요 일간지들이 발행한 다음날치 신문 초판을 보고 중앙부처와 대기업, 그리고 안기부(훗날 국정원으로 개명) 등은 관련 뉴스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됐다. 불리하거나 민감한 뉴스가 나오면 이를 조정하는 역할이 공보관실의 주요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가판신문은 오후 6시30분을 전후해 광화문 동아일보 앞에 한데 모아져 오후 7시 조금 넘어 여러 기관으로 배달되곤 했다.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가판신문은 1980년대 초중반 시작해 2005년 무렵 중단됐다. <사진 미디어오늘 이창길 기자>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1995년에서 1996년까지 1년 동안 교육부 공보관으로 일했다. 신문 가판이 나오던 시절이다. 저녁에 가판이 나오면 새벽 본판이 나오기 전에 교육부와 관련된 과장, 오보 등을 전부 다 체크했다. 그리고 해당 신문사 야간국장을 찾아가서 기사를 아예 빼거나 수정을 요청해야 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새로 나온 신문과 비교해서 어떤 내용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전부 정리해서 교육부의 해당 업무 담당 국장에게 통보했다.

나에게는 신문사 담당 국장을 설득하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다. 기사를 조정함으로써 교육부가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신문사에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를 중점적으로 부각하면서 설득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에 대한 실국장이나 장차관의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 에피소드를 풀자면 정말로 소설책 한 권이 될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와 대학국장이 장관을 모시고 경남 창원대학에 가서 부산·경남 지역 대학 총장 간담회를 실시하게 되었다. A장관은 장관 전에 대학 총장까지 지낸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장관으로 총장들을 만나는 자리에 마음이 편해져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기자가 없었다. 처음부터 기자를 들이지 않는 자리로 만들었고 모두가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KBS 기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장관이 이야기하다가 그만 기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게 되었다.

기자들이야 당연히 장관들과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고, 평소 그런 관계에서 오는 이러저러한 불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하고 나서 장관도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여기는 뭐, 신문쟁이 없겠지요?”

그렇게 웃으며 말을 정리했는데 그때 내 예감이 이상했다. 다들 웃고 있는데 딱 한 사람만 표정이 달랐다. 옆으로 가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혹시 이 대학 직원이십니까?”

그 사람의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그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죄송하지만 소속이 어떻게 되십니까?” “KBS 창원총국 기자입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기자는 우연히 직원들 틈에 섞여 회의장에 들어오게 되었고 말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장관의 발언을 들은 것이다.

나는 곧바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임 장관이 강연 자리에서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장관직을 그만두게 된 사건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일로 기자에 대한 서운함을 이야기했으니 구설이 생길 상황이었다. 기자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니 마음을 다해 사죄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기자도 크게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일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기자가 3~4일 후에 도청 기자실에서 차를 마시다가 자기도 모르게 장관의 지난 발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때마침 거기에 『연합뉴스』 주재 기자가 있었다. 그 발언을 듣자마자 ‘기자 수첩’ 코너에 기사를 올리고 말았다. 중앙의 교육부 기자실에서 이 기사를 발견하고는 난리가 났다.

“공보관님, 큰일 났습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내 밑의 과장 전화였다. 그때 국회에 나가 있던 나는 전화로 간단한 경과를 듣자마자 문을 뛰쳐나갔다. ‘큰일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우선 기자실에 바로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스물여덟명인데 그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기자 여섯 명이 있었다. 그 여섯 명의 기자에게 먼저 전화를 돌렸다. “미안합니다. 제가 지금 기자실 들어가는데, 좀 도와주세요. 제가 공보관을 1년 했는데 막바지에 이거 잘못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무조건 읍소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기자들에게 장관의 말은 도전적이었지만 이기우 공보관은 돕자는 뜻이 있었다. 아마도 나와 통화를 한 여섯 명의 기자들끼리 상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기들의 뜻만으로는 나머지 20여명 기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드니까 강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 같다. 곧바로 기자들 중 한 사람의 전화가 왔다.

“공보관님, 기자실에 들어올 때 각오하고 들어오세요. 그리고 차분하게 대응하세요.” 기자실에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 여섯 명 중 평소 친했던 두세 명이 갑자기 기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야, 공보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당장 안 나가?” “우리를 이렇게 개망신시키고 당신이 들어올 자격이 있어? 빨리 안 나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막말이었다. 옆의 다른 기자들도 적극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 소리를 견디며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잘못했습니다. 저를 죽이더라도 차분히 이야기는 한번 들어 보고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게 소리를 질렀던 기자 중 한 명이 앙칼지게 말을 받았다.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어?” 그러자 또 한 명의 기자가 말을 받았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나 봅시다!”

내가 터놓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기자에 관한 장관의 발언은 실제 장관의 견해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말들이 있다는 식으로 열거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진심을 담은 사과의 말도 함께였다. 내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각자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러자 여섯 명의 기자가 아니라 다른 기자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이 국장 막내가 고3이잖아. 우리, 이기우 국장 보고 수습합시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 중 반은 이미 기사를 3분의 2 이상 쓴 상태였다. 마무리해서 발송만 하면 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기자 대표가 말을 받았다.

“기사 뺄 수 있으면 빼고, 만약 못 빼면 기자 대표인 제가 데스크한테 양해를 구하겠다고 말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결국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 이번 건은 다루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고 나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정말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기자실 밖에는 차관까지 나와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잘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만약 기자들이 평소 나에게 신뢰를 갖지 못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까. 아들이 고3이라는 말이 통할 수 있었을까? 신뢰가 있었기에 그 말도 통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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