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19] 김대중대통령 앞서 교육부 맨파워 ‘증명’

국정과제 추진보고 회의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이해찬 교육부장관(1998년)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금방이라도 인사조치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술자리 이후 한 달이 지났는데도 내 직책은 그대로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때 이해찬 장관은 나에 대한 신뢰를 한창 저울질하던 때였던 것 같다.

한번은 친한 사람의 초대로 저녁을 먹게 된 일이 있었다. 식사 말미에 지인은 나에게 이런 말을 꺼내 놓았다. “니 자리 옮긴다던데 안 옮기나? 잘린다던데?” “내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대답할 정도로 이미 마음이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할 일은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초기, 거제교육청에서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시설계로 자리를 옮겨 세달을 먹지에 글씨만 썼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언제 일을 그만두더라도 이기우는 맡은 일만큼은 최선을 다해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계속됐다. 기획관리실장이 할 일도 나한테 시키는 일이 잦아지는 게 아닌가. 물론 일이 주어지면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되는 일은 끝까지 관철시켜 해냈고, 장관에게 확실하게 보고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이해찬 장관이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얼마 뒤에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 대통령 업무 보고가 닥쳐왔다. 부처마다 보고가 이루어지고 교육부가 마지막 보고를 하기로 배정되었다. 이때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질문을 하게 되어 있는데, 이 질문을 미리 여섯 개 정도 만들어서 대통령께 보고드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면 이 질문에 배석한 교육부 공무원이 답을 하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 한 꼭지는 대통령이 질문이나 건의할 것이 더 이상 없느냐는 말을 했을 때 정해진 부처의 대표 선수가 건의하는 것으로 보고가 마무리되는 수순이었다. 바로 이 마지막 질문을 교육부를 대표하는 국장이 하게 되었다.

보고 당일 12시, 국무위원 식당에 모여 대통령 업무 보고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보고까지는 두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건의를 하기로 한 해당 국장의 발언 내용이 장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해찬 장관이 말을 꺼냈다.

“이거 이기우 국장이 대신 해보세요.” 그때가 12시 30분이었다. 한 시간 반을 남기고 대통령께 보고하는 사람을 바꾸고, 그 내용까지 새로 준비하라는 지시였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장관이 이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어찌 되었든 내게 맡겨진 일이라면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장관의 말을 듣고 곧바로 떠오른 생각을 말씀드렸다.

보고가 시작되고 다른 사람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읽는 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나는 자료를 만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했다. 드디어 교육부의 보고가 끝나고 몇 차례의 질문과 응답이 이루어진 뒤에 내 차례가 되었다.

“지방교육행정국장 이기우입니다.” 늘 하던 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말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가 부산에서 부교육감을 하면서 경험한 일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운대 신시가지에 그 좋은 환경의 아파트를 지었지만 처음에는 분양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때 부교육감으로서 문정수 부산시장과 정순택 교육감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학교를 짓되, 교육에 관해서는 최상의 학교를 만들어서 부산시의 우수한 교사를 배치하는 겁니다. 그렇게 학교를 중심으로 홍보하면 분양 문제가 잘 풀릴 겁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을 풀어 나가자 회의장의 모든 눈길이 내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시장이 ‘그거 좋은 생각이다. 우리 한번 해보자.’ 이렇게 받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최고 시설로 지어서, 또 최고의 선생님을 배치하여 개교했더니 이게 소문이 나서 나중에는 아파트에 프리미엄이 붙고 엄청난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대통령님, 대단위 아파트를 지을 때 교육 시설이 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업자가 부담금을 내고 또 나머지는 지방교육자치단체가 분담해서 교육 시설을 잘 지었으면 합니다. 제가 평소에 건설교통부 관료들 하고 부딪치는 게 실은 이 문제입니다. 늘 학교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배치되는데, 사실은 주거 지역 중앙에 짓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보자면 옛날에는 화장실을 먼 곳에 두었는데 지금은 다 교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뒤로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는 시간이 단축되어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의 경우는 아예 교실 안에다 화장실 시설을 해 줍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바뀌고 학교가 바뀝니다. 그렇게 지역사회와 학교가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편견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마주 보고 이렇게 말하니까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이해찬 장관 역시 그걸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교육에 관한 것은 미래에 대한 투자입니다. 교육을 위한 투자는 어떤 부분보다도 우선되어야 합니다. 대통령님께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챙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던 김대중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김종필 총리에게 말을 건넸다. “이 문제는 총리가 맡아서 책임지고 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이어 대통령의 마무리 말씀이 끝나고 참석한 사람이 모두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해찬 장관이 내게 다가오더니 환한 얼굴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국장, 잘했어요.” 그날 저녁에 고생한 간부가 모두 모여서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해찬 장관에게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교육부의 맨파워가 재경부 등 경제 부처에 비해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와서 경험해 보니까 교육부 대단해요!”

이때를 계기로 이해찬 장관은 나를 무한히 신뢰하게 되었다. 대통령 보고가 끝나고 다른 부처의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교육부가 제일 잘했다 하고, 장관하고 악수하는 사람마다 교육부가 1등이다 해주니까 정말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정말로 한 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늘 하던 대로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다 보니 얻게 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바로 이 이해찬 장관으로부터 나중에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공무원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정말 끝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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