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18] 이해찬 교육부장관의 ‘리더십’과 ‘장악력’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과 함께 이해찬 의원이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친 표현 같지만 이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인수위 시절 그렇게나 내 주장을 꺾지 않았으니 이해찬 장관의 눈 밖에 났을 거라는 생각은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니겠는가. 이해찬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실국장 인사를 6개월 뒤에 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미 미운털이 박힌 나로서는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 셈이지만 그래도 결과가 뒤바뀔 리는 없었다. 실제로 겪어 보니 이해찬 장관은 정말로 일을 열심히 하고, 또 잘하는 장관이었다. 그가 취임하고 난 뒤 교육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일요일 오후 2시 두 차례씩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교육부 내 관련 담당자와 과장, 국장, 실장들이 모여서 업무별·부서별로 장관과 함께 벌이는 집단 토론회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대학입시제도에 대한 토론이라면 해당 업무와 관련된 사무관, 과장은 물론이고 나머지 국장 이상은 의무적으로 들어가는데, 보통 스무명 이상이 장관실에서 담당 과장이 배부한 자료를 보고하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해찬 장관은 책상 위에 큰 백지를 놓아두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질문하고, 답변이 나오면 메모하고, 참석자들 간에 의견이 갑론을박 이어지면 백지 위에 그것을 다시 찬반으로 정리해 가면서 전체 회의 내용을 이끌어 나갔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되지 않고 견해차로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회의를 해 보면 아무리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 30~40%는 일치하기 마련이다. 나머지 내용은 다시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몇 가지 문제만 보완한다면 합의 가능한 것이 30~40%, 합의가 완전히 불가능한 의견이 다시 30~40% 정도. 이럴 경우 이해찬 장관의 일처리는 그야말로 실용적이고 능률적이었다. 일단 그 자리에서 총론은 확정시키고 안 된다는 부분은 아예 제외시켜 버린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의견이 다른 것들만 골라서 다음 회의로 넘기는 식이다.
그렇게 다음 회의를 진행하여 앞선 회의에서 넘어온 의견에 반대가 다시 50~60% 정도 되면 떼어 버리고, 지지가 50~60% 정도까지 확보되면 새로운 정책을 출범시킨다. 그러면서 보완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회의를 반복하면서 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교육부 공무원들로서도 처음 해보는 고도의 과외수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관은 교육부 전반의 업무를 파악하고, 공무원들은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장이 되었던 이 토론회는 총 65회가 열렸다.
그런데 토론을 하다 보니 문제가 있었다. 6개월 뒤에 인사를 하겠다는 장관의 말이 있고 보니, 실국장들이 대체로 장관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반면 나는 달랐다. 이왕 장관의 눈 밖에 났으니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분명히 안 되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밝혔다.
그러다 보니 회의 내내 안 된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 유일하게 나 혼자가 된 것이다.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고시 출신이 아니니까 저렇게 막 나가는구나’ 혹은 ‘아예 장관 눈에 들 생각을 포기하고 무조건 반대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까 봐 염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할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사리사욕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양심에 걸리는 판단을 내린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 자문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면 내 행동의 원칙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토론 과정에서 나는 내 원칙을 그대로 지켰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곧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더 퍼져 나갔다. 심지어 기자들에게도 떠돌게 되었다. 한번은 장관을 모시고 기자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자 이해찬 장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이 국장, 잘 왔어.”
“아, 네.”
“이 국장 말이야, 내가 나중에 국회로 돌아가면 반드시 이 국장은 혼을 내 줄 거야.”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마도 내가 없는 와중에 기자들 사이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는 내가 공보관 할 때의 신문사 기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들이 믿고 한 시절을 친하게 같이 보낸 내가 장관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던 기자도 있었다.
“장관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 이 국장을 혼내 준다는 겁니까? 이 국장이 얼마나 뛰어난 공보관이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기자가 장관에게 정색하면서 항의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해찬 장관 역시 술이 좀 오른 상황이었기에 정말로 기자들과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나중에 이 사건이 있고 난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일들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해찬 장관으로서는 무수한 토론과 회의를 거치면서 내가 맷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일부러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했던 기간이 바로 이 기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성실하게 내 할 일을 해 나갔다.
술자리에서 그런 사건이 있은 다음 날부터 기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장관에게 내가 확실하게 찍혔고, 지방교육행정국장이라는 내 직책이 곧 다른 사람으로 바뀔 거라는 확신에 찬 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