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23] ‘국회통’ ‘국회 전문가’ 된 비결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1년 하면 잘했다는 기획관리실장을 3년 반이나 하면서 일곱 분의 장관을 모셨다. 그러다 보니 장관이 오해할 일도 많았다. 그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장관이 처음 오면 국회 해당 상임위원회에 인사를 하러 간다. 인사를 하고 나면 국회의원들이 장관을 조금만 계시라고 말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나한테 말을 건넸다.
“이 실장, 좀 봅시다.” 그러고는 나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꺼낸다. 대체로 여러 가지 부탁을 하는 경우다. 그 당시의 국회의원은 장관이나 차관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다. 장차관이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 확실히 처리를 해 주니 장관을 세워 두고 나를 불러 평소 간직하고 있던 부탁을 해 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들이 장관을 기분 나쁘게 했다. 사정을 모르는 신임 장관이 보기에는 자신을 물 먹이는 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곤란을 겪었던 일이 많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 상황이 파악되면서 저절로 풀리는 오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공무원으로서 정부의 행정 과제나 예산 문제 해결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만나 왔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국회통, 국회 전문가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다. 국회의원들을 만날 때 ‘부탁을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접근하지 말고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쪽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국회의원 입장에서 공무원을 상대할 때 공무원보다 더 많은 지식이나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논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이런 성향 앞에서 공무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국회의원에게 정보를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우리 쪽에 불리한 정보는 아예 제공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읍소하는 식으로 부탁하는 것이 좋을까?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국회의원이 자기 논리를 펼칠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료를 만들어서 국회의원에게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쪽에서 정책을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까지도 이쪽에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은근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이제 국회의원들은 오히려 해당 공무원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정책의 중요한 동반자가 될 준비를 한다. 혹시 법안에 반대하더라도 거기에는 상대를 일부러 골탕 먹이겠다거나 곤경에 빠뜨리겠다는 나쁜 마음은 없다. 오히려 중요한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하여 애초의 법안이 수정될 기회를 이쪽에 제공해 주게 된다. 이런 관계가 축적되면 국회의원은 해당 공무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늘 도움을 얻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해당 분야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는데 어느 국회의원이 마다하겠는가. 이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 서로 ‘윈윈 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성, 정성과 성실함을 보태야 한다.
지방교육행정국장 시절, 임명장을 받음과 동시에 장관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된 일이 있다. 선임자가 노력했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전략을 세웠다. 16명의 교육위원회 국회의원들 이름을 적은 ‘1일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일 국회의원들과 접촉하면서 하루하루의 동향을 기록해 나갔다. 동그라미(O)는 ‘가능’, 세모(△)는 ‘애매’, 엑스(×)는 ‘가능성 희박’이라는 표시였다. 매일매일 그 표시를 갱신해 나갔다.
처음에는 엑스가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면서 과정을 체크해 나갔다. 원인을 찾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다음에 만날 때는 취약 부분에 대한 대안을 들고 국회의원들을 만났다. 물론 무조건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대안과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나중에는 끝까지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국회의원 세 명이 남았다. 그 결과를 정리하여 장관에게 보고했다.
“와, 이 사람 참. 정말로 국회의원들을 이렇게 매일 만났어
요?” “네, 장관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 장관님이 남은 세 분을 만나 주세요. 만나 주시는데, 꼭 성사가 안 되어도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분들은 장관님이 먼저 만나자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책이나 법률 개정 같은 경우 진정성이 전달되고 소신과 믿음이 있어야 먹혀들어 간다. 자료만 주고 끝나면 아무도 감동받지 않는다. 상대를 감동시킬 때까지 찾아가야 한다. 장관이 국회의원을 만날 정도로 성의를 보이는 법안이라면, 성의를 받아들이는 쪽에서 감동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을 두드려야 한다.
흔히들 삼세번이라고 말하는데, 그걸로는 어림없다. 네 번은 부딪쳐야 한다. 삼세번은 흔한 ‘상식’이고, 이 흔한 상식에 마음을 바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네 번째부터 상대의 생각이 조금 바뀐다. 거기서부터는 상식을 조금씩 넘어서는 것이다. 만남의 횟수가 다섯 번, 여섯 번으로 점점 늘어날수록 상대의 생각은 더 달라진다.
‘뭐지? 이렇게 하는 거 보니 뭔가 있나 본데?’ 상대가 이런 생각을 해야 분위기가 바뀐다. 내 모든 국회 활동은 이런 과정을 거쳤다. 내 열정과 뚝심을 지켜본 국회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나를 국회통, 국회 전문가로 인정해 준 것이다. 다른 분야라고 다르겠는가.
기자들이 교육부에 출입하는 경우,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데스크가 교육과 관련된 상황 돌아가는 것을 보고 “기사 한번 써!” 하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빼 먹듯이 바로 기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평소에 기자들에게 정책과 현안에 대해 소상하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냥 단순한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이거 해 주세요.”, “이거 좀 부탁합니다.” 하는 식이 아니라 왜 이 정책이 필요한가를 기자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들어서 제공했던 것이다.
그 뒤, 그 기자의 주관하에 기사가 나오면 그 기사가 비록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라도 받아들였다. 이미 서로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었기 때문에 정말 그 기자의 생각이라면 잘못을 지적하는 부분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우리 쪽에서도 평상시 늘 돼 있는 것이다.
부탁을 하지 말고 도움을 주어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다. 소통은 신뢰를 만든다. 신뢰가 깔려 있다면 잘못을 지적하는 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갖추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품격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