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22] 대한민국 1급 공무원이 뜻을 모았더니

청와대 전경. 왼쪽 건물이 서별관이다. 2001년 7월 19일 이곳에서 열린 ‘7.20 교육여건개선 추진 사업’ 관계부처 최종 회의 결과, 초중고 교원 2만3600명 증원 정책이 발표된다. 3년 동안 1208개 학교를 신설해서 학급당 학생 수를 35명으로 줄이는 ‘혁명적인 교육환경 개선 방안’이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당시 상황을 어제 일처럼 묘사하고 있다.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는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교육 분야에 있어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핵심에는 소위 말하는 ‘7.20 교육여건개선 추진 사업’이 있다.

2001년 7월 20일, 초중고 교원을 2만3600명 증원하겠다는 정책이 발표된다. 3년 동안 1208개 학교를 신설해서 학급당 학생 수를 35명으로 줄이겠다는 혁명적인 결정이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분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총 소요액만 16조 원이 들어가는 교육 환경 대수술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 정책을 실무적으로 추진한 책임자가 바로 그 당시 교육부 기획관리실장이었던 나였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인원은 행정자치부와, 예산은 기획예산처와 각각 합의를 해야 하는데 이 부처에서 쉽게 승인을 해 줄 리가 없었다. 그냥 접근하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막대한 인원과 예산 규모였기 때문이다.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이 해당 부처 장관을 여러 번 모아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장관들끼리 의견이 충돌하는 바람에 디데이는 7월 20일로 정해 놨지만 도무지 조율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정책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현재 45~50명 되는 학생으로는 새 교육과정을 학교 현장에서 진행하기에 역부족입니다. 우리가 경험했지만 한 학급당 50명이 있으면 그냥 전달만 하는 수업에 그칠 뿐입니다. 새 교육과정은 단원마다 성취 수준이 정해져 있는데 이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생 수가 많아서는 안 됩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데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문제 해결 능력이라든지 상상하는 능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지금 방식으로는 문제 해결 능력, 판단력, 창의력 전부 갖추기란 역부족입니다. 다들 아시잖습니까.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할 때는 대학 교육의 방향도 질보다 양이었지만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경쟁력을 갖추기가 힘듭니다.”

정말 그랬다. 체험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학벌이 좋을수록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우리 교육은 비판적·성찰적 해결 능력보다는 단순한 수동적 수용 능력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되면 답이 이미 마련된 사례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써먹을 때는 좋지만, 아예 답이 없거나 새로운 창조력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경우가 생긴다. 언제나 예정된, 예측 가능한 문제만 맞닥뜨리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변화한 교육을 위해서는 단계적으로 교실당 학생 수를 35명까지는 반드시 줄여야 각종 교육 개선이 가능한 기본적인 인프라가 갖추어지는 셈이었다. 그러나 내 호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부처마다 자기 이익을 고수하려니까 말이 안 통했던 것이다. 장관들을 모아서 진행한 회의는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디데이 하루 전 날인 7월 19일, 청와대 서별관에서 1급들만 모이는 마지막 회의가 잡혔다.

청와대 교육비서관, 재경비서관,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 교육부 기획관리실장 등이 모여서 최종 협의를 하는 자리였다. 대통령은 속이 타는 상황이었다. 이 엄청난 정책을 조율해서 당장 내일 발표를 해야 하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으니 말이다. 1급들끼리 회의를 했지만 역시 진전은 없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이런 한심한 사람들 말이야. 대한민국 1급이 이것밖에 안돼?” 나의 갑작스러운 고함으로 회의장 안은 금세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계속해서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나는 돌아갈게요. 오늘 오후에 기자 만나서 그만두겠다고 말하겠습니다. 교육을 위해서 투자하는 게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 어디 뭐 돈 버리는 일입니까?”

몇몇 사람이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걸어오는 것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무시하며 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고는 열쇠를 틀어쥐고 있는 해당 부처 실장들에게 목청을 높였다. “어이, 박 실장. 당신도 그만둬, 이런 식으로 하려면. 내도 그만두려니까.”

그러고는 사무관에게 백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당신 사표 써. 내도 사표 바로 써 줄게.” 일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자 참석자들 사이에서 끄응,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못마땅하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좀 전까지의 팽팽한 반대의 기류는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이때 오종남 재경비서관이 말을 거들었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합시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확실히 바뀌어 가고 있었지만 조금 더 추동력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목청을 높였다.

“되니 안 되니 토론만 하다가 그냥 이렇게 끝낼 겁니까? 오 비서관님, 이거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이 실장님, 조금 기다려 보세요.” 여기저기서 탄식과 웅성대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합시다. 머뭇거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나는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며 힘 있게 사람들을 다그쳤다.
“이렇게 웅성거리기만 할 거면 내는 못 믿습니다. 각서 씁시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손으로 합의 사항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사이 내가 확실하게 치고 나간 것이다. 예산 확보와 인원 확보에 대한 합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먼저 교육부를 대표해 사인하고 청와대부터 돌렸다. 교육비서관, 재경비서관의 사인을 받고 나머지 참석자들에게도 돌렸다. 마침내 사람들이 마지못해 각서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그렇게 각 부처의 참석자들이 모두 사인을 했다. 그때의 합의 각서 내용이다.

합의 사항
1. 소요 재원은 2002년과 2003년 예산에 각각 전액 반영하기로 확정하고
2. 교원 증원 및 교수 증원에 대하여도 계획대로 2002년부터 증원하기로 함.

2001년 7월 19일
청와대 재경비서관 오종남, 청와대 교육비서관 정기언,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 김범일,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박봉흠, 교육인적자원부 기획관리실장 이기우,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이용섭

나는 합의 각서를 들고 당당하게 정부종합청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 옆에는 행정자치부 김범일 기획관리실장이 차를 함께 타고 있었다. 행자부 김 실장은 나에게 자기 서류철을 보여 주었다. “이 실장, 이거 한번 보세요. 오늘 합의 내용이 전부 불가하다는 서류들입니다.” 나는 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한결같이 합의 불가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었다.

“하, 이 실장 시퍼런 서슬 때문에 오늘 할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우리 행자부 안에서 나를 보고 뭐라고 할지…….” 그의 깊은 한숨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실장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거요, 우리가 오늘 중대한 결정을 한 겁니다. 이거 말입니다, 이런 일을 교육부의 이익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우리의 후손, 우리나라 경쟁력을 위해서 꼭 넘어야 하는 벽이었습니다. 그 벽을 넘는 데 큰 힘을 보태 주신 거예요.”

마침내 7.20 교육여건개선 추진 사업은 예정대로 발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가 없었다면 넘기 힘든 벽이었다. 이로써 김대중 대통령은 교육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또 그날 대통령이 결단할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려 준 각 부처 실장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분들이 자기 부처의 입장을 떠나서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는 자리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나는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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