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⑪] “진실·성실·절실하게 최선 다했을 뿐”

1990년 개국해 2017년 10월 서울 도곡동에서 경기도 고양시로 이전한 교육방송 발전엔 필자가 예산당국 관계자를 삼고초려하며 예산을 확보한 덕택이 무척 컸다. 당시 기획재정부 예산총괄과장이 “내가 졌습니다”라고 필자에게 말했다. 필자의 답은 이랬다. “교육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해 주신 겁니다.” <사진 고양신문> 

[아시아엔=이기우 이해찬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살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바로 삼실(三實)이다. 진실, 성실, 절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진실이다. 다른 말로 진정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무슨 일이든 진정성이 전달되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천하를 얻으려면 사람을 얻으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마음을 움직이려면 절대 거짓으로는 안 된다. 오직 진실만이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추진할 때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말만 진실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진실’이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 어떻게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을까. 스스로 믿지 못하는 진실을 상대방에게 진실하게 전달한다는 생각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냥 내 생각을 힘주어 전달한다고 해서 진실이 전달되는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내 진실에 확신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전제되었을 때만이 절절하게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

교육부 과장 시절, 교육방송과 관련한 조직을 만들게 된 일이 있었다. 조직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정부 조직의 협조가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한다. 조직이 생기면 인원이 배정되고 운영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획재정부가 승인을 해야 다음 단계의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가장 먼저 기재부 예산실 예산총괄과장을 만나서 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합의를 안 해 주었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도 들어 주지 않고 번번이 퇴짜를 놓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교육부는 광화문에 있고 예산실은 과천에 있었다. 열 번을 찾아갔다 열 번 모두 퇴짜를 맞았다. 물론 그 과장은 내가 열 번 찾아갔다는 사실을 몰랐다. 찾아간 사람만이 숫자를 셀 수 있으니까.

교육방송 주조정실 <사진 고양신문>

내가 갈 때마다 예산총괄과장은 “아, 이 과장, 뭐 그거 가지고 또 왔어요.” 이렇게만 가볍게 지나쳤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 속으로 ‘내가 열 번은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결국 열 번을 찾아 갔다. 나 스스로의 진실함에 관한 나름의 기준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한두 번 찾아가서 안 되면 포기를 하거나, 좀 더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세 번까지 시도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열 번을 실천했다.

열 번 찾아가고 나서도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다음 월요일 아침에 예산총괄과장 방으로 출근했다. 아침 7시 30분이었다. 예산총괄과장은 8시에 출근을 했다. 그는 방에 들어와서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나는 깍듯하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건넸다. “아, 과장님, 양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이 교육방송 관련 조직 건 때문에 광화문에서 여기 과천까지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오는 데 한 시간, 가는 데 한 시간, 머무는 시간 한참. 이렇게 하면 오전 시간을 다 보내다시피 하는데 이 건이 해결되지 않아서 오늘은 여기로 바로 출근했습니다. 저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어차피 며칠 여기 왔다 갔다 할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 과장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콧방귀도 안 뀌고 무시했던 상대가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으니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사무실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예산실 공무원들은 출근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예산실에 손님이 오면 나는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손님이 가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손님용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나는 그다음 날도 과천의 예산실로 출근했다. 예산총괄과장은 아침에 나를 보고는 또 한 번 놀랐다. “또…… 왔어요?” 나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네, 과장님. 제가 여기 앉아 있는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업무 보십시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는 그날 점심을 먹고 늦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이제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건넸다. “이 과장, 대체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아니, 신경 쓰지 말라니까 왜 신경을 쓰십니까?” “신경 안 쓸 수가 있습니까. 뭘 어쩌자는 거예요?” 약간은 화가 난 듯 그가 물었다. 나는 그때서야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과장님은 헤아리질 않았을 겁니다. 제가 여길 몇 번 왔다 간 줄 아십니까? 열 번 왔다 갔습니다. 과장님은 늘 과장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만 했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 주신 적이 있습니까?”

당황한 듯 예산총괄과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로소 자신이 나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내친김에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시간만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내가 늘 준비해서 가지고 다녔던 자료를 펼쳐 놓고 간결하지만 진실하게 설명을 했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예산총괄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해주었다. “오늘은 내가 이 과장한테 졌습니다.” 만약 내가 단순히 그 과장의 사인이 필요해서 사인받는 것을 목적으로 생각했다면 그 순간에 미소를 지으며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신이 나서 곧바로 교육부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사인을 받으려고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의 중요성과 가치를 믿고 있었다. 그런 진실함이 있었기에 열 번 넘게 예산실을 찾았고, 새벽부터 예산실로 출근해서 이틀을 더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장님, 저한테 졌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교육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해 주신 겁니다. 과장님이 이긴 것이지 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진정성이고 정성이다. 만약 열 번을 가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사무실에 앉아서 내 말을 들어 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고, 그래도 답이 없으면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손님용 의자에 앉아서 계속 생각하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나 스스로가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런 과정을 견딜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먼저다. 누구도 진실한 자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진실에게는 결국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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