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마가렛 미첼 원작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포스터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필자는 거의 매일 ‘덕화만발’이라는 글을 쓴다. 남들은 날 보고 글을 잘 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부족하고 재능 없음을 한탄하곤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통틀어 상이라곤 타본 일이 없다. 맨날 싸움이나 하고, 악동들과 함께 학교 담을 뛰어넘기 일쑤였다.

그런 필자가 이런 정도의 글을 쓰는 것도 어찌 보면 경이(驚異)로운 일이다. 여학생 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연애편지나 쓰며, 문학개론 한번 읽어 보지도 못한 필자가 시인이고, 수필가며, 칼럼니스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웃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원불교문인협회장을 무려 6년간 역임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일간지와 월간지, 여섯 군데의 인터넷신문에서 필자의 칼럼을 싣고, 전 세계 수만의 덕화만발 가족이 내 글을 본다. 그리고 책도 12권 썼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신앙이다. 원불교 입교 후 나는 교당(敎堂)에 기여할 방법을 찾다가 원불교 여의도교당 회보(會報)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무작정 회보발간을 건의, 회보편집장을 맡았다.

그로부터 8년 6개월 동안 매주 한번도 거르지 않고 <원불교 여의도 회보>를 편집하고 글을 썼다. 아마 이 정도의 글을 쓰고 작가(作家) 소리를 듣는 것도 여의도 회보에 ‘지성여불’(至誠如佛)의 정신으로 글을 쓴 작은 공덕(功德)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와 같은 사람도 글을 쓰는데, 누구나 글을 쓰고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럼 어떤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쓰면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첫째, 작가적 심성(心性)이다.
누구나 글을 읽고 글을 쓴다. 글은 마음에서 나오는만큼 독선이나 아집에 빠지면 안 된다. 세상과 자연, 우주와 별빛을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하는 심성을 기르는 것이다.

둘째, 작가적 기질(氣質)이다.
작가의 기질은 작가의 생명이며 동력이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나처럼 인생 3막을 넘어서야겠다는 절체절명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셋째, 작가적 인간성(人間性)이다.
글의 폭과 깊이는 작가의 인간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 등 삼학수행을 통해 좀더 나은 인품을 기르고 또 길러야 한다.

이 세 가지만 기르면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작가가 될 수 있다.

어느 여기자가 26세에 발목을 다쳐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인생이 무너지는 좌절과 낙심을 겪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서 펜을 다시 잡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쓰는 소설이어서 스토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인내하면서 소설 한권을 쓰는데 무려 10년이 걸렸다.

그녀는 원고를 가지고 3년 동안 이곳저곳 출판사를 다녔지만, 풋내기가 쓴 소설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또한 읽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원고가 다 헤어져서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어느 날, 한 출판사 사장을 만나려는데 만날 길이 없어서 사장이 출장 가는 시간에 맞추어, 기차를 탈 때 붙잡고서 애원을 했다.

“사장님! 여행하시는 동안 이 원고를 딱 한번만 읽어주세요.” 사장은 너무 간절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받아 들고 가방에 넣었으나 일정이 바빠 원고를 읽지 못했다. 출장을 마치고 집에 오자 전보가 와 있었다. “사장님! 원고를 한번만 읽어주세요.”

몇달 후에 전보가 또다시 와서는 “사장님! 원고를 한번만 읽어주세요.” 세번째 전보가 왔을 때 기차 정거장에서 “사장님 딱 한번만 읽어주세요”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사장은 너덜너덜한 원고를 가방 속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장은 소설 속으로 푹 빠졌다. 10년간에 걸쳐 썼던 그 소설을 순식간에 읽었다. 그리고 바로 출판을 했는데 하루에 5만부가 팔렸다.

1936년 당시로서는 굉장한 사건이었다. 이 소설이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그 젊은 여성이 바로 마가렛 미첼이다.

그 소설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게 돼 있다. “이 땅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붙잡고 살았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그 마지막 대목을 다시 읽어본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Tommorow is another day) 그렇다. 내일은 오늘과 전혀 다른 하루다. 안 된다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맛볼 수 없는 바로 그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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