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불러낸 왕소군의 ‘춘래불사춘’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코로나19 때문에 분명 봄은 왔는데 영 봄 같지 않은 4월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은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에 나온다.

?중국 전한(前漢) 11대 황제는 원제(元帝, BC 74~33)이다. 한(漢) 원제 건소(建昭) 원년(BC 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린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 본명 왕장(王?)도 18세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왕소군 <다음블로그>

황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다. 하지만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렸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한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했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인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낸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들은 그의 애달픈 삶을 노래했다. 그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게 바로 당(唐)나라 측천무후의 좌사(左史)였던 동방규(東方?)가 쓴 ‘왕소군의 원한’(昭君怨)이라는 ‘소군원삼수’(昭君怨三首)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胡地無花草)
봄이 왔으되 봄 같지가 않구나(春來不似春)
나도 모르게 옷 띠가 느슨해졌나니(自然衣帶緩)
몸이 약해진 때문만은 아니리(非是爲腰身)

‘?춘래불사춘’은 말 그대로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는 뜻이다. 벌써 석달째 법회도 못 보고, 덕화아카데미도 중지한 채, 덕인회의 모임도 없어 거의 두문불출이다. 코로나 19 사태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모양새다.

지금 세계적인 ‘팬데믹’ 상태에서 그나마 우리나라를 부러워 할 정도로 안정되어 가고 있다. 정부는 2주간 더 ‘사회적 거리’를 두라고 호소했다. 이 막바지 고비를 왕소군의 비가(悲歌)를 들으며 넘기면 곧 ‘춘래불사춘’도 완연한 봄으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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