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거울 앞에서 나를 점검해 볼 시간

거울 앞에 선 여인은 소꿉놀이를 기억하고 있다. 아이의 종알거림을 떠올린다. ‘엄마 아빠’ 역할 놀이, 이젠 스스로 놀이 속으로 빠져든다. 거울 속의 나에게 나는 말을 건다. 이상과 현실의 대면이다. 나는 나에게, 그녀는 그녀에게 의사를 묻는다.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다.<글 사진 백승휴의 강의 중에서>

[아시아엔=김서권 예수사랑교회 담임목사]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절대 계획을 믿으십시오. 말씀의 흐름을 타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해방이 선포되었다면 그리스도에 집중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규례대로, 습관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끊임없이 선포했습니다.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 나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 죽음으로 완벽하게 해결하시고(요한복음 19장 30절) 부활의 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사도행전 17장 1~3절)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내 몸에 와 있는 거짓말쟁이, 욕심쟁이, 열등감에서 오는 살인의 유혹에 빠트리는 미움을 사로잡아 없앨 때 나는 마침내, 신사적이고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마태복음 12장 28~29절)

바울이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던 헬라 귀부인들처럼 나는 과연 신사적이고 고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혹은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울을 죽이려고 시기, 질투, 열등감, 살인의 광기를 가지고 데살로니카에서 베뢰아까지 쫓아오는 찌질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인 법관들이 많고, 국회의원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왜 기독교는 더욱 찌질하고 싸늘하고 추하게 타락하는지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요?

거울 앞에서 나를 점검해 보십시오.

창세기 3장의 근본문제에 무지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종교지도자들은 원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인품, 성품의 가면을 쓰고 의롭게 사는 척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그들이 결국 어떤 일을 저질렀습니까?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살인자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웠던 고결한 인격으로 어떤 일을 저질렀습니까? 간음하는 현장에 쳐들어가 여자를 끌어내어 예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성경의 율법까지 제시하면서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자신의 원죄를 모르면 이렇게 무서운 악마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창세기 3장의 현장입니다.

창세기 3장의 운명을 내 몸에서 확인하면 그 누구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끌려온 여인, 율법의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는 이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몸을 굽히고 흙먼지 날리는 바닥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뭐라고 쓰셨을까요?

목사, 장로, 권력자, 그 누구도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악마로 돌변한 나의 완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창세기 3장 15절로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소유하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누구든지 수용하고 포용하며 사랑하는 신사적이고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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