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교회 김형중 목사 묻다①] “예배는 꼭 교회에서 드려야 하나?”

베이직교회 예배당

[아시아엔=김형중 베이직교회 목사] 오늘 함께 고민해 볼 주제는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려도 되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주일 성수를 하지 않은 것인가?”하는 주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교회들이 부득이하게 온라인 예배를 드리겠다고 발표했다. 인터넷 상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 여론이 팽팽하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주일성수는 본교회에서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대학생 때, 꼭 주일을 껴서 MT를 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혼났다. 저와 같은 경험을 가지신 분들이 계실 거다.

주일예배를 온라인예배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찬성하는 분들은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하나?’ 등등 주로 상황에 대한 이유를 들며 찬성한다. 또한 예배가 교회라는 건물에 묶일 필요가 있나? 어디서든 영과 진리로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반대하는 분들은 주일성수를 위반하고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말한다. 주일은 주일답게 지내야지, 교회라는 틀을 깨트리는 순간 예배는 단순한 모임에 불과할 뿐,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은 예배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 정의

성경에 나타난 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면, 성경 속에서 예배와 관련된 단어들을 살펴봐야 한다.

– 구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① ‘샤하이’(Shahai, 창 18:2, 욥 1:20 등)는 ‘굴복하다’, ‘머리 숙이다’, ‘엎드린다’는 뜻으로 구약에만 120회 이상 나오는데,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냄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② 섬긴다는 뜻의 ‘아바드’(Abad)인데,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라고 알려준다.

– 신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① 프로스퀴네오(Proskuneo)는 신약에서 약 60회 정도 나오는데, ‘무릎 꿇다’, ‘허리를 굽힌다’ 등의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② 라트레이아(Latreia)는 예수님을 유혹하는 사단에게 예수님께서 최종 선언하실 때 ‘다만 그 분만을 섬기라’(마 4:10)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로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낸다.

③ 레이투르기아(Leitourgia)는 일반적으로 예전(禮典), 의식(儀式)을 나타내는 단어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원래의 뜻은, 에바브로 디도가 바울을 섬기고(빌 2:30), 예루살렘 교회를 헌금으로 섬겼던 일(고후 9:12), 그리스도인의 구제(롬 15:16, 27) 등을 의미한다.

④ 호모로기아(Homologia)는 죄의 고백과 찬양을 의미하는 단어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시인(是認/Confess),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적 의미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지하는 자존적(自存的)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의존적(依存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 나의 근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장소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없다.

그럼 이렇게 질문한다. ‘솔로몬도 성전을 짓지 않았냐?’ 맞다. 역대하 7장 12~16절이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뒷 부분에 답이 나온다.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역대하 7:17~22)

바로 하나님의 규례, 법도, 말씀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존재가 중요하지 솔로몬 성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솔로몬의 성전은 예배 처소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건물을 지은 것이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닌 거다.

공예배는 왜 생겨났나?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사람들이 모이니 기존의 식탁 예배, 가정예배의 형태로는 몰려오는 수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공동으로 모이는 예배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관계 중심적이고 교제 중심적인 예배가 예전의 중심의 예배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공예배만 예배고, 가정예배는 부수적인 예배로 인식될 수박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교회공동체라는 조직이 생겨나고 제도화되면서 나타나는 여러 부작용이 발생한다. 조직에는 당연히 질서가 있어야 하고, 운영이 돼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열과 서열에 따르는 폐해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등은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다며, 무교회주의를 주장한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예수님과 유대인의 관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기적과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다. 이를 본 유대인들의 반응, 특별히 종교인이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반응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몰랐던 이방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 말씀을 듣고 인정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율법 수호와 전통이라는 욕심이 사랑과 생명의 외침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다. 내 것이 너무 소중해서 더 소중한 것을 못 듣게 만든 거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할지 모르겠다. 지난 2000여년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만들어 온 여러 전통들, 예배 형식, 예배에 관한 전통들에 얽매여 복음과 생명이 전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우리의 것을 지키기기에 급급하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보아야겠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맹인이 눈을 뜨는 것, 아픈 사람이 회복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권리, 목적, 이념 지키기에 급급했다. 인간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구원이라는 상품을 팔고, 종말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삶을 옭아맸던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강도라고 표현했다.

그럼 공예배는 필요 없나?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어왔던 교회의 큰 기능 중 하나가 교제다.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를 주셨다. 그게 교회다. 성경도 하나님께서 개인을 찾아오신 것 같지만, 전체 맥락으로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주신 말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의 무리라면, 또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사장이라면, 우리는 어디에서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배 신학자 깁스(Gibbs)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혼이 쉼을 누리는 것”이라고 예배를 정의했다.  또 헉스터블(Huxtable)은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사랑을 표시하며,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한편,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이웃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 아닐까?

혹 어떤 이들은 예배는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도, 사마리아 산도, 교회당도, 가정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4:21~24)

즉, 예배드리는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셨다. 

‘성도가 교회’라는 고백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라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그곳이 직장이든, 교회든, 가정이든, 어디에서든 말이다.

필자 베이직교회 김형중 목사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