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교회 김형중 목사 묻다⑧] 정치권력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는?

일제시대 독립과 애국의 상징이던 태극기가 최근 몇년 사이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공식국기임에 틀림없다. 

[아시아엔=김형중 베이직교회 목사] 지난 15일 예상과 달리 한 정당의 압승으로 총선이 끝났다. 선거 결과를 보면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독재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동시에, 마음을 합치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선거결과를 보고 한 분이 문의하셨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번 정권이 옳지 않아 보이는데, 그런 정권에도 순종해야 하나요?” 진보성향을 가진 분들은 “뭐 이런 쓸 데 없는 질문을 하나?” 하실 수 있지만, 보수성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궁금해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1. 구약적 사고의 오류

“뒤집어 엎어야지!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기독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경 중에서도 “정복하라”는 구약적 사고가 강하게 나타나는 의견이다. 창세기에도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창세기 1장28절)는 명령을 주신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놓치는 것이 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특별히 인간에게 위임하신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남유다는 시작은 좋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왕들, 지도자들, 종교인들이 하나님 아닌 권력, 부, 강함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잘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인간의 죄성, 욕심이 하나님 뜻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다 정작 중요한 하나님을 잃었다. 물론 중간 중간, 히스기야와 요시야 같은 왕들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종교개혁 영향력이 얼마나 갔나?

히스기야 같은 경우는 기복신앙의 전형적인 실수를 범한 전형적인 인물 아닌가? 또한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어떠한가? 오늘날 종교개혁가들의 후손이라 불리는 이들은 칭찬을 받고 있는가? 오히려 전보다 더 타락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지 않나?

결국 사람이 하는 개혁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해도 끝이 좋지 않다. 중간 중간에 악한 영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 공동체도 한두 세대가 지나고 나면 그 안에 권력이 생기고 재정이 생기면서 타락하게 되어 있다.

2. 성경은 무엇이라 하는가?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로마서 13장 1~2절)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대로 산 사람이 폴리캅이라는 속사도(續使徒, 사도의 제자, 요한의 제자)다. 이즈미르, 서머나 지역의 총독이 폴리캅을 협박할 때, 그는 총독에게 대항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영혼을 해롭게 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충분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말 그대로 명언이다.

폴리캅을 비롯한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정부에 대항하거나 저항군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권에 순종했지만, 하나님만을 섬겼던 사람들이었다. 정부에 대항하는 대신 순교를 택한 거다.

우리는 내게 주신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인정한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고백은 그렇게 하고는, 실제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모순이다.

3. 서로 사랑하라

이 질문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냐 소극적으로 관망할 것인가를 따질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문제다. 환경과 상황이 최악이라고 해도 능동적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썩어지고, 세상에 빛을 비출 것인가, 아니면 수동적으로 종교생활의 불편함으로 토로하고 끝낼 것인가의 문제다.

즉,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권, 어떤 정부가 서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된다. 어떤 말씀인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장34절) 어떤 사람을 사랑하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마태복음 5장44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시는데, 나와 의견이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겠는가?

어떤 분들은 “앞으로 교회의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앞으로 교회의 어려움이 예상된다면, 그 어려움이 내게 주어지지 않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 즉 군중을 동원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방법보다는, 주어진 어려움 가운데 능동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구해야 한다. 폭력적인 방법이나 선동을 동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칼로 흥한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장52절) 만약, 질문하신 분의 견해처럼 지금의 정부가 맘에 들지 않는다 혹은 교회를 대하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되면, 그리스도인은 더욱 비폭력적으로, 그들을 품고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차원 높은 삶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지, 폭력과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태복음 22장21절) 복음이 혼탁해지고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시대, 말씀으로 잘 분별하고, 승리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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