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이삿짐을 싸며’ 손흥기 “누우면 흥부네 같은 우리집이지만”

이삿짐을 싸며

몽땅 해봐야
봉고 트럭 한 대 분도 안 되는
허재비 같은 피난살림이지만
기울어진 담장너머 바람은
시원하게 넘나드는데 어머니,
평생동안 삭혀 두었던 그 시름
이제는 쭉쭉 찢어 버려도 그만
괜찮을 거예요

누우면 흥부네 같은 우리집이지만
창문 열면 논두렁 타고 넘어 온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쏟아지는 양짓말 무논에 별빛은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고
한길 건너 조금 참이면 흘러흘러
한평생 낮게만 살아 온
반짝, 놀빛 부서지는 저녁강도 있는데요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어머니,

빼앗김도 짓밟힘도 맨살 깊숙이 스미는
외로움도 스러지는 햇살에 몸 뉘이고
하얗게 이울어 오는 꿈과 터질 것 같은
우리들 이 땅 위에서의 사랑,

이젠 펼쳐 보기로 해요 아까적
윤성이놈 마른 버짐꽃 핀
시든 얼굴로 이 골목 저 고샅길을 폴짝거리며
자랑하고 다니던 그 여린 그림자를 보셨나요

가슴 하나 가득 눈물을 담고 잊기 위해,
아쉬움 하나 없이 술 섞인 한숨으로
이제 쉽게 잊는 일만 남았다고
봄햇살 맑은 한낮 이삿짐을 싸며
오늘 따라 운전기사 아저씨의
이즈러진 조가악달 강물소리도 드높은 건

그래요 어머니,
우리의 가슴에도 봄이 온건 아닐까요
지난밤 기다리다 지쳐 포기해 두었던
우리들의 봄을 이제야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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