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씨알 속 우주 한그루’ 복효근 “무시무종”(無始無終)

감꽃 필 때는 소쩍새 슬피 울고

언젠가 단감을 깎아먹고
그 씨알 하나를 세로로 쪼개어본 적이 있다

씨알 속에는 길이 1센티도 안 되는
뽀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느낌표 같은 나무의 줄기에 두 개의 앙증스런 잎사귀가
화살표의 형상으로 이미 하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화살표 이 쪽으론
한 하늘 가득 창창히 뻗어오를 감나무의 전 생애와
한 그루 감나무가 걸어갈 수억 년이,
화살표의 저쪽으론 또
감나무가 걸어온 수억 년이
그 작은 씨알 속에 압축되어 있었다

감씨 무시무종

그 속에
수억 년의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나와
또 수억 년 뒤의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내가
태반 속의 아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우주가 잠시 비밀을 들켜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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