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흔적 찾기③] 아버지의 삶 송두리째 빼앗아 간 ‘동서 냉전’
“나의 부친 문순남(1924~1974, 文順南)은 일본제국주의 말기 조선 총독부 동원령에 의거 전장에 끌려가 중국 동북지역 만주 봉천에서 복무했다. 선친은 일본 패망과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포로로 수용돼 옛 소련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억류돼 3년 4개월간 강제노동을 하다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내몰리며 기약 없는 ‘지옥생활’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 일을 하는 문용식(59)씨는 16살 때 여읜 아버지 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20년 넘게 국내외를 헤매고 있다. 그는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문용식씨는 지난 1월20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 특강을 통해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나라잃은 설움을 후손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엔>은 몇 차례에 걸쳐 문용식씨의 잃어버린 아버지 흔적 찾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시베리아 억류자 모임인 ‘삭풍회’ 6대 회장을 맡았던 故 이재섭 선생(경기 시흥, 2014년 작고 시베리아 중부 크라스나야르크에서 수용생활)의 생전 육필수기 첫 머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나는 시베리아 억류 참상에 대한 이야기를 제의받았을 때 좀 주저했습니다. 지금부터 65년전에 일어났던 억류 참혹상을 새삼 상기시키기가 무척 어려운 일인 까닭에 망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처참한 포로생활상의 진실을 일본인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줌으로 그대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저씨가 얼마나 전쟁의 고통을 주었는가, 다시는 전쟁을 도발하면 비통과 참혹만 남길 뿐이고 엄하고 냉혹한 역사적 단죄만 돌아올 뿐인 그 진상을 말해주기 위하여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문순남은 관동군 130여단 776대대 소속으로 1945년 8월16일 봉천(선양)에서 포로가 되었다. 입대하고 채 2달이 안 돼서였다.
하루 전 히로히토 일본 왕이 연합국에 항복했으니 아마도 소속부대가 투항하면서 무장해제되고 포로 신분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9월경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공화국 내 ‘카라간다 99수용소’로 이송되고 예하의 여러 분소를 거치며 채탄작업 등 다양한 일에 내몰렸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08년 러시아정부기관에서 보내온 ‘군사문서 보존소’ 공문서와 2011년 국무총리산하 ‘일제 강제동원 진상조사위’에서 발간한 ‘중국 동북지역 강제동원 조선인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서다.
소련 수용소에 흩어져 강제노동에 내몰렸던 한국인 억류자들은 고국 귀환을 위해 48년 10월부터 12월까지 극동에 위치한 하바로스크 지역 380수용소로 집결했다.
그들이 수용되었던 지역은 북으로는 북극권(나리리스크 등) 남으로는 카스피해 주변과 중앙아시아 남부, 서쪽으론 모스크바 주변의 도시까지 소련연방 전역에 있었다.
대부분의 수용소는 시베리아에 위치하며 포로의 80%가 이곳에 수용되었다. 수용지역별로 철도, 도로, 항만 건설 과 보수, 벌목, 광물 채굴, 주택건설 등에 투입되면서 개인별로 일일 작업목표가 부여됐다. 성과가 미흡하면 배급량도 줄였고 여가시간마저 통제했다.
영하 40~50도의 추위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시설은 열악했고 강추위에 노출되며 노동현장에 내몰렸던 포로들은 수용 첫해에만 6만명 가까이 사망했다고 한다.
뜻밖에도 제정러시아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창으로 1899년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이준 열사가 자결한 회의)에서 열렸던 1, 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체결된 ‘육상전 법규와 관례에 관한 조약’에 가입했다. 이 조약은 훗날 포로의 인권을 취급한 제네바협정의 기초가 되었다. 초기의 국제법으로서 조약은 ‘전시 전쟁포로와 부상병에 대한 취급 규칙’을 정립하였으며 이 조약엔 일본도 가입했다.
나는 일본과 러시아(소련)정부가 제네바협정에 가입하기 오래 전에 제네바협정의 모태가 되었던 이 조약에 가입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크게 놀라웠다.
일본과 러시아는 국제법상 한국인 억류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양국 정부가 억류문제 해결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인을 우롱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 패망 후 체포되었던 조선출신 1만여명 중 7천여명은 수용소에서 조선인 신분이 밝혀져 비교적 조기에 석방됐다. 아버지를 포함한 2300여명은 12월 소련극동 나홋트까항을 떠나 화물선으로 북한정부 지역 흥남 부두에 도착했고 흥남여고 임시수용소로 이송되어 북측의 기관으로부터 다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
49년 2월 초부터 만주, 북한 출신을 제외한 남한 출신 억류자 500여명은 여러 조로 나뉘어 경원선 열차를 타고 38선 인근 철원군 철원읍에 위치한 월정리역에서 하차 했다.
부친의 고국 귀환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북한정부가 남한정부에 사전 연락을 주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도보로 38선을 넘는 과정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일부는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생존자들 증언에 의하면 그들을 남한군인이 데려갔는데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도 했다. 여하간 대부분이 越境 과정에서 군과 경찰에 체포되어 경기 파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당시 생존자(고 이재섭, 삭풍회 6대회장) 수기에 의하면 경찰로 인계된 억류자들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폭행도 당했다. 이후 일제시기 병기공장 기지였던 인천 송월동 ‘전재민’(전쟁 구호민) 수용소로 재이송 되었고 수용소에 있는 동안 한·미 방첩기관, 정보기관, 경찰로부터 혹독한 조사를 받고 나서야 1949년 3월26일부터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출발했다.
아버지가 고향 개풍군 청교면에 돌아온 것은 4월 초순 무렵이었다. 집을 떠난 지 3년 10개월만이다. 아버지가 고향에 나타나자 마을에서는 “일본군대 가서 죽은 줄 알았던 순남이가 살아왔다”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만 20세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 통치말기였던 1945년 6월 입대했다. 당시 사회는 조혼풍습이 있었고 아버지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신혼생활 중이었다. 아버지가 입대를 기피하고 도망갔다면 형이 대신 가야했고 남은 가족들의 삶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아버지 상가에 오셨던 고모가 말해 주었다.
일본이 진작에 개방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력을 키워가는 동안 조선말 지배세력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고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아버지와 같은 ‘착하디 착한 우매한’ 백성은 민족 수난시절에 전장에 끌려가 동토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 돌아왔지만 조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은 이어졌다.
냉전은 조국을 분단시켰고 돌아온 아버지가 살아가는 동안에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주었다. 삶의 희망마저 빼앗어 버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