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흔적 찾기②] 2차대전 무임승차 소련에 짓밟힌 식민지 백성
“나의 부친 문순남(1924~1974, 文順南)은 일본제국주의 말기 조선 총독부 동원령에 의거 전장에 끌려가 중국 동북지역 만주 봉천에서 복무했다. 선친은 일본 패망과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포로로 수용돼 옛 소련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억류돼 3년 4개월간 강제노동을 하다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내몰리며 기약 없는 ‘지옥생활’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 일을 하는 문용식(59)씨는 16살 때 여읜 아버지 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20년 넘게 국내외를 헤매고 있다. 그는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문용식씨는 지난 1월20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 특강을 통해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나라잃은 설움을 후손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엔>은 몇 차례에 걸쳐 문용식씨의 잃어버린 아버지 흔적 찾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1945년 2월 소련 크림반도 얄타에는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소련의 스탈린 등 3국 수뇌가 모였다. 독일에 대한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 회담에서 ‘독일의 분할 통치’ ‘군수산업의 폐쇄 및 몰수’ ‘주요전범의 국제재판 회부’가 결정되고 극동에 대해서는 별도의 의정서가 채택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태평양전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선 극동에서 일본의 힘을 빼려면 소련의 참전이 절실했다. 또 소련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은 과거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사할린과 쿠릴열도 일대를 소련에 반환하고 외몽고의 독립을 인정하는 선물을 제시한다. 의정서는 “유럽에서 소련이 독일과 전쟁을 끝낸 후 3개월내 대일전에 참전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련의 참전에 따라 일본은 45년 초부터 전황이 불리해지자 전쟁에서 연합국에 항복할 경우에 대비해 ‘천황과 본토의 안녕을 우려하며 자국민을 현지에 유기하는’ 비열하고 반인도적 방안을 수립하였다.
결국 소련정부가 일본인을 시베리아 등 지역에 억류하고 노역에 종사시킨 원인은 일본정부의 묵시적 동의 하에 이뤄진 것이며 이것은 억류배경에 있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어 그해 7월 ‘포츠담선언’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거부,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불러온다. 원폭이 투하되자 소련은 이틀 뒤인 8일 포츠담 선언문에 서명하고,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한다.
이를 기화로 소련은 북위 38도 북쪽을 무력 침공해 일본군인과 군속 64만명을 무장해제하고 포로로 잡았다. 이중 1만여명이 조선 출신이었다. 그 가운데 나의 아버지 문순남도 포함돼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8월23일 ‘국가방위위원회 명령 9898호’ 를 전선에 하달했다. 이 극비문서에는 △시베리아 지역과 극동지역에서 견딜 수 있는 신체 건강한 일본군 50만명을 선발한다 △지역별 1천명 단위로 건설대대를 구성한다 △지급하는 의복과 침구류는 전시 획득 물자로 대체한다 등이 포함돼 있다.
스탈린은 8월8일 포츠담선언에 서명하고 8월23일 극비명령을 통해 일본군 포로들을 소련연방 2천여개의 수용소에 수감하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2차대전 말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갈 지도 모를 만주, 한반도 북부, 사할린 및 쿠릴열도 일대에 대한 일본의 전후 처리 방침을 보여주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하나는 천황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된 고노에 후미마로가 작성한 ‘화평교섭요강’이다. 이에는 ‘천황제’와 ‘고유영토 유지’를 전제로 만주 일대에 주둔한 관동군 및 민간인의 억류와 노역제공에 일본정부가 동의한다는 조건이 담겨있다.
다른 하나인 일본 대본영 아사에다 참모의 ‘실사보고’ 등 일련의 관동군 문서에도 “본토의 안녕을 위해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과 민간인을 그대로 잔류시켜 필요한 곳에 종사 시키도록 한다”고 돼있다.
2차대전 막바지에 대일전에 참전하며 戰勝에 무임승차한 소련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식민지 백성의 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