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흔적 찾기⑤] 6.25전쟁 후 이번엔 한국군에 입영
“나의 부친 문순남(1924~1974, 文順南)은 일본제국주의 말기 조선 총독부 동원령에 의거 전장에 끌려가 중국 동북지역 만주 봉천에서 복무했다. 선친은 일본 패망과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포로로 수용돼 옛 소련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억류돼 3년 4개월간 강제노동을 하다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내몰리며 기약 없는 ‘지옥생활’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 일을 하는 문용식(59)씨는 16살 때 여읜 아버지 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20년 넘게 국내외를 헤매고 있다. 그는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문용식씨는 지난 1월20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 특강을 통해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나라잃은 설움을 후손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엔>은 몇 차례에 걸쳐 문용식씨의 잃어버린 아버지 흔적 찾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아버지가 귀국한 당시?정국은 몹시 불안했다. 당시 시대상황은 아버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고 정부기관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부친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고향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그러한 일상에도 삶은 포로생활 당시와는 비교 할 수도 없었다. 고향집은 많지 않은 농토지만 선대로부터 벼농사와 밭농사가 가업으로 이어져 아버지도 그 일을 도왔다. 그것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흉흉한 소문이 마을에 돌았고 포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 큰 아버지가 걱정스런 마음에 아버지 보고 먼저 피난하라며 남은 가족들은 상황을 살펴보고 인솔해 내려갈 테니 김포쪽으로 빨리 떠나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집을 떠났다.
단신으로 고향에서 가까운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지금의 강서구 공항동)로 피난했다. 아버지는 피난기간이 잠시 일 거라 생각하고 그곳에 임시로 정착했다고 했다. 그런데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임진강 건너 고향 땅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고향의 가족과 다시 단절되고 생이별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운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인생에서 2번씩이나 전쟁의 여파로 집에 돌아갈 수 없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갑작스레 피난 내려 와 연고도 없었고 거처도 불확실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뿐이었다. 그나마 포로생활 중 접한 여러 경험을 살려 근근이 의식주를 버텨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1954년 1월 육군에 다시 입대했다. 두 번째 입대였지만, 그래도 내 나라 군대에 어엿이 입대한 것이었다. 부친은 만 4년만인 1958년 1월 전역하며 다시 송정리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그때 왜 군대에 다시 가야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이 서른이 되어 입대하게 된 동기가 ‘당신의 신분상승을 위한 자구책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뿐이다.
아버지가 머물던 송정리 인근에는 일제 통치시기 ‘가미가제특공대’가 훈련장으로 쓰던 김포비행장이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떠난 후 미군 군정 하에서 비행장은 필요에 의해 조금씩 확장되었다.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면서 사용하는 장비와 보급품 물동량이 늘고 공항을 이용하는 승객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6·25전쟁이 일어나고 김포 비행장은 수많은 미군 전투기가 출격하는 군용비행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58년 1사단에서 전역하고 아버지가 돌아왔을 무렵에 대통령령에 의해 종전의 여의도국제공항은 김포비행장으로 옮겨 국제공항으로 승격됐다. 이에 따라 정부예산으로 시설투자가 진행되고 인근에 살던 아버지가 하는 노동 일도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따라다닌 소련 체류 사실은 멍에로 남아 삶에 발목을 잡았고 아버지는 도무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市道를 달리하는 이동때는 경찰서 사찰계를 방문해 이동목적을 밝혀야 했고, 승인하에 이동해야 했다.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국가는 ‘국가란 이름으로’ 제압하고 지옥에서 돌아온 그들을 긴 시간 숨 죽여 살아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