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흔적 찾기⑧]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던 팔순 노인들 눈가엔 이슬이

“나의 부친 문순남(1924~1974, 文順南)은 일본제국주의 말기 조선 총독부 동원령에 의거 전장에 끌려가 중국 동북지역 만주 봉천에서 복무했다. 선친은 일본 패망과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포로로 수용돼 옛 소련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억류돼 3년 4개월간 강제노동을 하다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내몰리며 기약 없는 ‘지옥생활’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 일을 하는 문용식(59)씨는 16살 때 여읜 아버지 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20년 넘게 국내외를 헤매고 있다. 그는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문용식씨는 지난 1월20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 특강을 통해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나라잃은 설움을 후손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엔>은 문용식씨의 잃어버린 아버지 흔적 찾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삭풍회는 2012년 2월, 그들이 러시아땅에서 조국으로 돌아왔던 1949년 그 2월에, 그동안 찾았던 종로의 한 다방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누군가가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다. 팔순 후반의 피해자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졌다. 지치고 병든 몸으로 삭풍회를 지탱해 왔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정부는 끝까지 그들의 호소를 외면했다.

EBS e 지식채널에서 방영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한 장면. 고 이병주 회장 주위에 마이크가 집중돼 있다.

나는 이병주 회장님과 자주 소통하며 삭풍회 소식을 듣고 종로의 다방 모임에도 참석했다. 또한 일본의 후생노동성, 총무성, 후쿠오카사회보험센터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나의 ‘조회요청 서신’에 대해 일본의 각 기관은 “보관된 자료에서 문순남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일본에서는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무너졌고 더이상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은 날을 고민했다. 그러다 러시아에서 찾아보자는 생각에 외교부 러시아과에 민원을 넣고 일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노구의 삭풍회 회원 열분 정도가 나오셨는데 멀리서는 부산에서도 오셨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회원들 다수가 별세하고 일부는 건강이 악화되어 모임에 참석하는 회원들은 점점 줄고 있었다.

국권을 빼앗겨 일제가 일으킨 전쟁터로 끌려간 20살 청년들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머나먼 시베리아 동토에서 지옥체험을 하고 조국에 돌아와서도 핍박과 감시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족에게조차 알릴 수 없는 기막힌 일이었기에 어쩌다 만나는 모임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은 회원 간의 우애를 돈독히 만들었다. 한국정부나 시민사회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어떤 노력도 없던 시기에 한분 한분 별세하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막막하고 가슴이 저려온다.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한동안 참석하지 않는 회원이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도 할 수 없다는 소식에 한숨만 내신다.

삭풍회는 1994년, 1998년 당시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한일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 “한국인 구소련 억류문제를 거론해달라”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의 호소를 외면했다. 한참 후에 외교부에서는 이런 답신을 보내왔다. “한일 간에 미묘한 문제라 정부가 나서기 어렵다.”

2007년 어느 날 나는 종로의 다방에 가게 되었다. 회원들은 2003년 6월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법원에 제기한 ‘군인군속 재판 항소심’을 돕는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재판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조선에서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되어 사망, 부상, 억류, 강제노동 등의 피해를 당한 분들과 후손이 일본정부를 피고로 피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이었다.

한국의 원고를 돕기 위해 일본의 양심 있는 여러 시민단체가 연합해 ‘재판지원회’를 구성하고 소송비용 등 제반 문제를 지원했다. 그런데 우리정부는 일본의 시민단체가 재판 지원까지 하며 한국 피해자를 돕는 동안에도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했다. 주권국가의 국민이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오가면서 힘든 싸움을 하는 동안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모임에서는 회원들이 우리 정부의 무관심에 분통을 터트리고 원망하면서 한스러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 대화중엔 구소련에서 같은 피해를 당한 일본 ‘전국억류자협의회’(전억협)가 일본 정치권에 제기하는 이슈도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당시에 ‘전억협’은 일본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전억협 회원들이 “한국의 피해자들이 활동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성금을 모금해 보내왔다는 소식도 전했다.

나는 삭풍회 모임에 참석하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분을 만났다. 나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머리가 백발이던 노 신사는 묵묵히 피해자들의 한 많은 넋두리를 듣고 계셨다. 한겨레신문의 김효순 대기자였다. 일본, 러시아, 한국정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삭풍회 회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자 그곳에 왔던 차에 우연히 뵙게 되었다.

김효순 대기자는 부친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또 그 이후에도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힘들어할 때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삭풍회는 2012년 2월, 그들이 러시아땅에서 조국으로 돌아왔던 1948년 그 2월에, 그동안 찾았던 종로의 한 다방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누군가가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다. 팔순 후반의 피해자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졌다. 지치고 병든 몸으로 삭풍회를 지탱해 왔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정부는 끝까지 그들의 호소를 외면했다.

억류문제는 2010년 정부가 진상조사를 통해 조선인 2000명의 피해가 있었음을 공식발표했고, 2001년 일본 외무성이 삭풍회에 보낸 답변서에 “한국인 억류 피해 문제에 대해 국제법상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1965년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억류피해 문제 해결을 소홀히 한 것은 아주 잘못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지금부터라도 용기 있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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