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모택동이 유방이라면 시진핑은?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21년 중국공산당(중공)이 12인으로 창당될 때 모택동은 기록을 맡았다. 중공은 초기 진독수, 이대조, 왕명, 이립삼 등이 이끌었으나 실패했다. 모택동이 당의 영도자가 된 것은 1935년 준의회의에서였다. 모택동이 지방 瑞金에서 활동할 때 상해에서 당 중앙의 군사부장으로 모택동의 위에 있었던 주은래가 모택동 뒤를 좇은 것도 이 다음이다.

모택동은 漢나라를 세운 劉邦과 같다. 항우는 명문 출신이었고 스스로도 氣蓋世 力拔山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결국 천하를 차지한 것은 將之將인 유방이었다. 모택동은 유방에게서 농민의 마음을 잡는 방법을 배워 3항주의 8대규율의 紅軍를 만들었다. 이에 비해 상대였던 장개석 군대는 亂軍의 대명사였다.

모택동은 폭넓은 독서가였고 깊은 沈潛을 통한 사상가였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적용하여 모택동사상을 만들어내었다. 그 핵심은 모순론, 지구전론, 신민주주의론이다. 요점은 불리한 가운데 싸우는 방법인데 간결하고 명료했다. 모택동사상은 중공의 이론적 지도지침이 되었고 항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당히 攪亂했고 국부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1964년 나온 고대 총장 김상협의 저서 <모택동사상>은 명저로, 근래에 이만한 역저를 보기 힘들다. 김상협은 모택동사상 만큼이나 명료하고도 체계적으로 <모택동사상>을 저술했다.

시진핑은 모택동과 같이 당 주석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주의-사상-이론-관으로 이루어지는 체계에서 시진핑 사상이 모택동과 같이 사상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시진핑 사상은 한마디로 유소분발(有所憤發)인데 2000년대 초 有所作爲라고 하던 것보다 적극적이다. 등소평이 도광양회(韜光養悔)라고 한 것은 너무 나서지 말라는 충고였는데 시진핑은 중국도 이제 힘이 커졌으니 활개 쳐보자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한 등소평의 도광양회가 두렵지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시진핑은 오히려 경계와 분발을 자극한다.

明의 정화함대는 당시 서양과 비교도 되지 않는 대함대였으나 명은 이 함대로 해양국가로 나서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진 중국은 바다로 나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추구하는 시진핑은 웅비할 수 있는 해군력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중국 앞에는 여전히 미국 함대가 버티고 있고 일본과 인도, 호주도 합치고 있다. 당장 눈앞의 남중국해를 내해로 만들기가 간단치 않아서 사드 배치로 미국의 편임을 공언, 중국에 자극을 준 한국에도 응원을 구해야 할 판이다.

시진핑이 모택동과 같은 차원에서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는가는 의문이다.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는 노동자·농민만이 아니라 민족자본가 등을 이용하여 열세를 보완하기 위한 ‘약한 자’의 전략이었다. 그에 반해 시진핑은 등소평의 注意를 거슬리고, 장쩌민, 후진타오 등과 함께 길러놓은 중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항우와 같은 ?者다.

모택동에 비하면 시진핑은 習皇은 될지언정, 思想은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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