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백묘흑묘’ 등소평과 집권 2기 시진핑

등소평 <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등소평은 세 번 실각했다가 다시 살아난 부도옹(不倒翁)이라고 한다. 모택동이 중국을 건설했지만 등소평이 없었다면 오늘 모택동도 없다고 할 것이다. 중국이 오늘날 G2를 운위할 정도가 된 것은 등소평 덕분이다. 모택동이 등소평을 몇 차례나 실각시키면서도 남겨두었던 것이 옳았다. 등소평은 티베트의 봉기를 강력 진압한 西藏 서기 호금도(후진타오)를 직접 골랐다. 호금도가 소수민족을 제압하여 핵심국익을 수호할 수 있는 강단을 높이 산 것이다.

홍군에서 사령과 정치위원은 二身同體였다. 당시 홍군 사령은 주덕이고 모택동이 정치위원이었다. 항일전 승리를 기리는 영화시사회에서 온통 모택동 만세만 뒤덮었다. 등소평은 “왜 毛 위원 만세는 있고 朱 사령 만세는 없는가?”라며 모택동도 있는 앞에서 이렇게 힐문했다. 이것이 등소평의 命題였다. 등소평이 실각할 때마다 유백승(劉伯承)이 보호해주었다. 화중야전군(2野)에서 유백승이 사령, 등소평이 정치위원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중공의 군대다. 등소평이 최후까지 지키고 있던 자리가 군의 통수권을 쥔 중앙군위 주석이었다.

등소평은 주은래와 같은 노동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하여 20세기 초의 유럽을 이미 보았다. 등소평 이론은 한마디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白?)의 실용주의였다. 미국의 한 개발도상국 경제전문가가 “한국에는 박정희가 있어 성공했는데 중국에는 박정희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중국에 박정희가 있었는데 바로 등소평이었다. 등소평은 박정희에 배워 사실상 국가주도의 자본주의인 중국식 사회주의를 창안했다. 특구를 세우고 개혁개방하는데 있어서 등소평은 키신저를 최대한 이용했다. 등소평은 수많은 인재를 미국의 실리콘밸리 등에 보냈다.

그리고는 “미국에 남아 정보와 기술을 활용하라. 그리고 들어올 필요도 없다”고 했다. 등소평은 동남아 화교들의 자본을 최대한 이용했다. 현금은 가지고 있으나 현지인에 경계를 받아 언제나 불안한 화교들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등소평은 미국의 기술과 화교의 자본, 박정희의 노하우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어디에서든 쥐를 잘 잡는 白猫黑猫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대전략이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실용주의자 등소평은 문화혁명 등 모택동의 실패를 보완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한국도 최대한 활용하여 국가발전의 토대를 쌓았다. 집권 2기 시진핑은 어떤 역할을 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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