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의 진짜 교훈은?···당쟁보다 뼈아픈 국방 외면·군인 홀대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역사성이 있고 여장(女墻) 포루(砲壘) 옹성(甕城) 등 나름의 방어설비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에서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그럼에도 조선이 계속 명을 섬기자 청 태종 홍타이지는 명에 대한 공격 이전에 조선을 처리하기로 한다. 청병은 압록강을 건넌 지 수삼일 만에 한양에 도달했다.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 청은 조선의 방어 근거지인 산성들은 우회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조선 조정의 창황망조(蒼慌罔措)가 그대로 드러난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본래 숭문천무(崇文賤武)의 조선에는 국방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한민족에 군사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일제와 미군에서 배운 것이다.

일본군에서 군사를 익힌 김석원, 백선엽 등 소위 친일파 군인들이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낸 것은 제정 러시아의 기병 중장이었던 만넬하임이 소련군에서 핀란드를 지켜내어 국부가 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군을 농락(籠絡)하는 작금 우리의 행태는 참으로 한심한 것이다.

청의 八旗는 로마 군단(軍團), 나폴레옹의 사단(師團)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술집단이다. 3백명을 단위로 니르가 되고 5개 니르가 1개 갑라(甲喇), 5개 갑라가 1기를 편성한다. 이렇게 1기는 7500명이었다. 이리하여 청의 八旗는 총 6만이었다. 八旗는 전원이 탁월한 기병이었고 명으로부터 도입한 홍이포(紅夷砲)도 갖추었다. 청은 이 병력으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을 통일하였다.

명 숭정제(明 崇禎帝)는 유적(流賊)인 李自成에 쫓겨 자살한 후였다. 入關 후 몽골 8기, 한군(漢軍) 8기가 편성되고 지방에는 녹기(綠旗)가 편성되었지만, 청의 정규군은 만주 八旗가 기본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상비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일이 터지면 중앙에서 장수가 파견되어 지방에서 서류상의 병력을 모았다. 임진왜란의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이 그들이다.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훈련도감(訓鍊都監)만이 임진왜란을 겪은 후 생겼고, 한양을 수호하는 수어청(守禦廳), 총융청(摠戎廳)은 호란을 당한 후 생긴 것이다. 근왕병(勤王兵)이란 것은 실제 허수였다.

임진왜란에서 조정은 민심과 이반되었다. 광해군은 그나마 분조(分朝)를 이끌고 왜군과 대적한 공이 있었는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은 그나마 모을 수도 없었다. 조선이 그처럼 명에 대해 재조(再造)의 恩을 강조한 것은 이순신과 의병의 공을 인정하기 싫은 까닭도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조정이 기대하던 근왕군은 결국 모이지 않았다. 모여도 烏合之卒이었다.

후에 청은 중국 역사상 드문 강성을 보였다. 이를 한눈으로 보여주는 북경의 자금성은 명과 청 양조에 걸쳐 중국의 심장부였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고궁박물원은 신해혁명 후 자금성을 전환한 것이다.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나면서 장개석은 중요 소장품을 대만으로 후송해 타이페이에 고궁박물관을 만들었다. 중국 문화의 진수를 차지하는 것이 정통이라는 생각이었다. 북경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잔여다. 이 사정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북경 고궁박물원에 남겨진 것만으로도 찬탄을 금치 못 하지만, 반드시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남한산성을 찾으니 효종갱(曉鐘羹)이라는 음식이 있다. 병자호란 때 효종(봉림대군)이 즐겨 찾은 음식인가 했더니 새벽에 끓이는 해장국으로 한양의 양반에 배달한 조선 최초의 배달음식이었다. 요즘 KBS에 소개되어 人山人海를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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