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반대 ‘철인’ 강재륜 지다···12·12 쿠데타 전두환·노태우와 육사 11기 동기
강재륜 교수 23일 별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61년 5·16의 성공에는 5월 18일 육사생도의 혁명지지 행진이 결정적이었다. 5·16은 이미 이루어진 역사고 그 결과가 조국근대화로 이어졌다는 것을 수용하더라도, 사관생도를 쿠데타에 끌어들인다는 발상은 용서할 수 없다.
쿠데타는 본질적으로 반역이기 때문이다. 병력을 끌고 육사에 들어온 생도대 부대장 박창암은 생도들을 겁박했다. 생도들은 결정을 못하고 동창회에 여부를 물었다. 당시 동창회장은 강재륜이었다. 강재륜은 사관생도는 군의 기준인데 반역에 참가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후일 자신이 육사생도를 5·16에 참여시켰다고 자랑하는 몇몇이 12·12를 일으킨다. 강재륜은 제주도 출신으로 1952년 4년제 육사가 개교하자 1기(후에 11기로 기칭 통합)로 입교하였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육사 철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며 많은 후배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강재륜은 육사를 그냥 ‘육사’라 부르지 않고 꼭 ‘육군사관학교’라 불렀다. 모교에 대한 그의 사랑과 자부심이 묻어 있는 일화다. 철학자로서 강재륜이 존중하던 학자는 박종홍, 박홍구, 조가경 세 분이었다. 박종홍 교수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 철학계의 어른이었다. 박홍규 교수는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불어를 넘나들며 아리스토텔레스, 베르그송, 라이프니츠를 원어로 강독하는 향연을 베풀었다. 조가경 박사는 독일에서 공부한 세계적인 현상학자(現象學者)였다. 이분들에 대한 강재륜의 존경은 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와 품격을 보여준다.
“한국에는 철학교수는 많지만, 철학자는 별로 없고, 철학자는 있어도 철인은 없다고 한다.” 강재륜은 훌륭한 철학자였다. 일부 후배는 강재륜을 ‘哲人’으로까지 숭앙한다. 강재륜의 전공은 독일 관념론의 최고봉인 헤겔이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어 칸트, 헤겔로 모아진다. 그의 1988년 박사학위 논문은 <변증법적 유물론>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저희들이 어떻게···” 하며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강재륜을 육사에 그대로 있게 하였다가는 위험하다고 본 하나회는 보안사령관 김재규를 시켜 육사에서 몰아내었다. 강재륜의 형 강재언이 일본에서 한국사상사 교수로 있는데, 조총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모략이었다. 이것은 강재륜의 박사논문이 <변증법적유물론>이니 그의 사상이 이상한 것이 아니냐는 투의 트집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물러난 강재륜은 홍진기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일보 동서문제연구소에 재직하였다. 당시 이 연구소에는 신상초, 황성모 등 저명한 지성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였으나 박정희 정권에 의해 박해받고 있던 인재들이었다. 그 자신 경기중, 경성제대를 나와 일제의 고등관을 지냈고 자유당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내다가 영어생활도 한 ‘당대의 수재’ 홍진기는 역경에 처한 이들을 알아보고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강재륜은 이후에 동국대에 가서 국민윤리과를 만들고 주임교수가 되었다. 국민윤리과는 원래 10월유신 후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립시키기 위한 도구적 목적으로 생겨났었다. 강재륜은 이를 윤리학의 정통과 핵심을 가르치는 학과로 변모시켰다. 국민과 군의 온갖 사랑과 기대를 모았던 11기는 12·12로 처절히 망가졌다. 때문에 11기 가운데 군인으로서 내놓을 사람은 별로 없다. 다행히 강재륜은 자신 있게 국민에 내놓을 수 있는 육사 11기다.
그가 상강날인 23일 별세했다. 불의에 대해서 추상같던 그가 첫 서리가 내린다는 이날 눈을 감았다.